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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신앙의 추구자

by 로드비취 2017. 11. 26. 22:22

본문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말라기1:1-14

 

 

1. 문단나누기

1: 말라기서의 성격

25: 사랑의 하나님

610: 제사장의 제물(잘못된 제사)

1114: 열방에서 크신 하나님

 

Opening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1:1)

 

우리는 성경에서 이 구절만큼 깜짝놀라게 만드는 구절을 찾기가 힘들다.

이 구절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서로 주고 받는 말을 기록한 것이다.

 

주께서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나이까? 도대체 주님이 우리를 사랑한다는 증거가 어디 있습니까? 믿을 수 없습니다는 말이다.

이스라엘 백성의 이러한 말투는 계속해서 말라기서에 이어지고 있다.

1:6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2:17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 하였나이까?”

우리가 무슨 말로 주를 대적하였나이까?”

 

이 반복되는 어떻게라는 말이 실상 말라기서를 여는 열쇠이며 백성들의 태도를 보여주는 말투이다.

백성들은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의 지적이 있을때 마다 순응하고 회개하기 보다는 이같은 말로 대꾸했던 것이다.

 

Kerigma

 

1. 주께서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나이까?

 

우리는 성경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임을 듣는다.

주일학생들도 요3:16을 노래 부르며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시고 나를 사랑하신다고 말한다.

하지만, 현실을 통해 우리도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임을 듣고 있는가? 도리어 힘들고 어려운 문제들로 인해 이렇게 반문하지는 않는가?

 

하나님 과연 계십니까? 왜 하필 납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하고 반문하고 있다.

 

왜 그랬을까?

말라기선지가 활동할 당시 이스라엘의 상황은 실로 암담했다.

정치적으로 바사의 지배하에 있었는데, 비록 압제의 증거가 나타나지는 않았어도 주권을 잃은 식민지 백성의 설움을 안고 살았을 것이다. 아무리 선량한 총독이 다스려도 속국 이스라엘은 주민세를 바치고, 바사군대에도 세금을 내야했다.

사회적으로 가뭄의 피해로 포도원은 병충해 특히 메뚜기떼가 휫쓸어 민족 전체의 생존 근거가 박탈당할 위기에 놓여있었다.

 

그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올 때 영광스런 약속의 말씀이 있었고, 곧 성취될 것을 믿었지만, 그 약속은 실현되지 않았고 여전히 비참한 상태에 있었다.

3:14에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니 만군의 여호와 앞에 그 명령을 지키며 슬프게 행하는 것이 무엇이 유익하리요하며 그들은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이러한 상황에 하나님이 너희를 사랑하신다는 말라기의 말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 어디있느냐고 반문하며 토를 달며 대꾸하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가? 하나님의 약속이 있지만,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그 분의 약속이 있지만,

현재 풀리지 않는 돈문제, 인간관계, 건강, 일들로 인해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고 있지는 않는가?

하나님이 날 사랑하신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하나님이 날 사랑하신 다면 왜 내게 이런 고통을 주신다는 말인가? 왜 속히 회복시켜주시지 않는다는 말인가?”

이렇게 입에 튀어 나온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에서가 야곱의 형이었지만,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를 미워하지 아니하였느냐고 말씀하신다.

히브리 사회의 통념상 장자의 권리와 위상에도 불구하고 동생 야곱을 선택한 것은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에 근거한 주권적 섭리의 결과였다.

 

에서의 족속의 에돔의 불행한 이야기가 왜 나오고 있는가? 에돔은 하나님이 그의 산이 황무케 하셨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시랑에게 붙이셨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가운데있어 그들이 쌓을지라도 하나님은 허셨고, 그들은 악한지경에 속한 자들이었다. 그들을 일컫어 여호와의 영영한 진노를 받은 백성이라 할 것이라 하셨다.

이러한 대조를 통해 하나님이 이스라엘 야곱의 족속을 사랑하셨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나님없이 살아가는 우리 주위의 사람들을 살펴보자 . 하지만, 그에 비해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랑은 얼마나 큰 것인가? 나를 사랑하시고 선택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해 보자. 우리는 없는 것을보기 전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세어보자.

허물로 죄로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의 피로 살리사 천국에 대한 확신과 소망속에 살게하신 것만으로 얼마나 큰 복을가진자인가?

2.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6절에 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제사장에게 경고하시는 것을 본다. 제사장들을 향해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이라고 부르고 계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의 불만을 그 책임을 먼저 제사장들에게 물으셨다. 지도자들이 하나님을 멸시하였다고 탄식하신다.

 

우리 각 기관의 어려움들을 생각할 때, 우리 지도자들은 어떤 책임을 느껴야겠는가?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공경하라고 말하기전에 똑바로 살아라고 하기전에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공경하는 자가 되어야 되지 않겠는가? 남의 눈의 티를 빼라고 하기전의 우리 눈의 들보를 빼야함이 옳지 않은가?

 

백성의 지도자인 제사장들은 하나님께 반문했다.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그들은 주의 단에 항상 무언가를 드리고 있었고, 하나님에 대한 제사를 쉬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아들은 그 아비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비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

그들은 하나님께 뭔가를 드리고 있었다. 하지만, 더러운 떡, 눈먼 희생, 저는 것, 병든 것을 드렸다.

 

 

하나님은 눈먼 것, 저는 것, 병든 것을 총독에게 드려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느냐 너를 가납하겠느냐고 반문하신다. 우리의 직장상사나 학교의 교수님에게도 장난스럽게 선물을 드리지 않는다. 그들의 인격을 존중하기 때문이다. 하물며 만군의 여호와이신 하나님에게는 어떻게 대해야 하겠는가?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구하기를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라고 간구한다 해도 보라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으니 내가 너희중 하나인들 받겠느냐고 반문하신다.

하나님은 간구의 기도를 듣기 전에 간구하는 자의 태도와 삶을 보신다.

  

우리는 과연 하나님께 진정으로 예배하고 있는가? 주일예배에 꼬박꼬박 나오지 않느냐고 심지어 수요예배와 다락방까지 참여하지 않느냐고 주님께 반문할 수 있다.

하지만, 더러운 떡으로 주님의 단에 올리고 있지 않는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지 않고 마지못해 억지로 사람을 즐겁게하기 위해 혹은 습관적으로 성의없이 예배하지는 않았는가?

예배가 마치 설교한편 듣는 것으로 착각하고 자신이 제물삼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린다는 사실을 잊어버리지는 않았는가? 사람은 외모를 보지만 하나님은 중심을 취하신다.

  

예배회복 캠페인 10분전 출석

<대통령은 만나신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예배의 자리에도 일찍 나오고 헌금도 성의껏 드리는가?

시간이 되어 마지못해 나오고, 헌금함이 도니까 어쩔 수 없이 헌금을 넣고 있지는 않는가?

사람은 외모를 보지만,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

 

행동은 뭐이 하면서 돈만 달라고 하는 아이가 있다면, 부모가 기꺼이 용돈을 줄 수 있겠는가?

하나님은 우상에게 빌듯이 돈만 갖다놓고 나쁜 행동대로 살면서 자신의 욕심대로 이루어지기를 비는 태도로 기도하기를 달가와 하지 않으신다.

주여 주여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들어갈 것이라고 우리 주님 말씀하셨다.

3. 성전문을 닫아 걸 자가 있었으면 좋겠다.

10절에서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너희가 내 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선언하신다.

차라리 너희 중 누가 성전문을 닫아 걸어서 헛되이 예배하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주님이 기뻐하지 않고 손으로 드리는 예물도 받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러한 우리의 모습도 그런 상태의 무성의한 재물도 받지 않고 성전물을 닫아 걸었으면 하시는 것이다.

 

13절을 보라 너희가 또 말하기를 이 일이 얼마나 번폐스러운고오늘날, 얼마나 많은 신앙들이 이런 모습인가? 예배에 나와주고 억지로 참여해 주는데 그것 마저도 귀찮아 죽을 지경이다.

전도하러 가자느니 기도회로 모이자느니 함께 성도간의 교제를 나누자느니 이런 것은 씨도 먹히지 않는다.

예배를 마치자 마자 급히 서둘러 나가버린다. 제대로 하나님께 예배드리지도 않으면서 예배 자체 만으로도 귀찮아 하고 번폐스러워 하는 모습!

하나님은 이런 예배 -예배가 귀찮아도 그나마 참여해주는 예배- 는 자신의 이름을 멸시하고 욕되게 하는 것이라고 심히 기분나빠하신다.

 

 4. 이 일이 얼마나 번폐스러운고?

 

백성들은 병든 것을 가져오면서 드리는 제사도 귀찮아 죽을 지경이었다. 사실 그들은 하나님께 좋은 것을 드리고자 약속했다. 하지만 흠있는 것을 일부러 골라 가지고 왔다. 하나님은 이것을 사기치는 것이라고 표현하셨다.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는 그분에게 바벨론의 속박에서 자유케 하시며 그들에게 선민의 언약을 주신 하나님께 그들이 하는 행위이다.

  이 얼마나 부끄럽고 통탄할 일인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과 우리 자신을 먼저 하나님앞에 드려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차라리 주님은 예배 받기를 원치아니하신다. 최고의 하나님은 최고의 정성을 바라신다. 하나님은 깨끗하고 온전한 것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거룩하신 하나님이시다.

예배는 하나의 종교의식이기 이전에 창조주시며 인격자이신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이기 때문이다.

추석에 자식이 부모를 방문했는데, 인사치레로 얼굴만 보이고 쏜살같이 가버리면, 부모가 얼마나 경멸감을 느끼고 서운해 하시겠나?

인사하는 것은 함께 식사도 하고 사는 이야기도 나누고자하는 시작일 뿐 인데, 안오기는 미안하고 왔는데 만나기는 싫어서 얼굴만 비친다면 얼마나 기분 나빠하겠는가?

우리가 이스라엘을 욕하기 전에 자신을 보자. 하나님께 사기치는 것은 좋은 것을 드리기로 약속하고도 흠있는 것을 드리는 것이다.

구원의 감격과 은혜속에서 하나님앞에 정직하고 성실히 살기로 약속한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나의 가장 좋은 시간은 나를 위해 쓰고, 짜투리 시간을 하나님께 드린다.

 

십일조에 있어서도 먼저 떼어 두는 것이 아니라, 남은 돈 중에 그것도 아까와 하면서 마지못해 십일조 봉투에 넣어 하나님께 헌금하고 있지는 않는가? 주님은 재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고 하셨다.

Point

우리가 예배하는 자가 누구인가?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우리의 태도를 결정한다.

그분은 큰 임금 두려운 하나님 이시다.

우리는 입술로는 주를 경외하나 행위는 그렇지 아니한 이중적 태도로 하나님을 대하고 있지 않은가?

하나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심으로 우리에게도 말씀하신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예수님을 십자가에까지 내어 주신 것이다.

 

우리는 거짓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큰 임금 두려우신 하나님, 또한,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더 이상 아프시게 하지말고 진정한 회개를 하자.

이스라엘이 축복하지 못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없어서나 능력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지 못하고 멸시한 그들의 죄악의 문제였다.

예레미야는 4:14예루살렘아 네 마음의 악을 씻어 버리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고 선언했다.

우리의 묵은 땅을 기경하고 이스라엘처럼 육체의 할례를 행하는 자가 아니라 우리 마음의 가죽을 베며 진정 하나님께 속한 자가 되자.

만군의 여호와이신 하나님의 백성으로 돌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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