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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회심

영혼의 양식

by 로드비취 2015. 7. 2. 16:40

본문

 

 

 

 

 

<카라바조 성 바울의 개종>

 

서론

 

2007년 7월 24일, 한국을 대표하는 지성인 이어령 전 문화부장관이 세례를 받기 위해 무릎을 꿇었다. 지금까지 쌓아온 인본주의적인 작업을 뒤로 하고 지성에서 영성의 세계에 들어가는 순간이었다. 이어령은 사람들이 지금까지 던진 물음에 답하기 위해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의 시작품에서부터 세례를 받을 때까지의 일상을 수상형식으로 이 책을 기록했다.

 “나는 어떤 종교도 믿지 않아. 증거가 없어. 철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기독교는 최상의 종교도 아니야.”
 퉁명스러운 말투로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던 17세 소년은 15년 후 같은 친구에게 전혀 다른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우리가 ‘사실’이라고 부르는 것 즉, 실제로 있었던 성육신과 십자가에서의 죽음,그리고 부활을 통해 그 존재를 보여주신 하나님이 곧 기독교다.”
 이 사람이 ‘20세기에 가장 사랑받고 널리 읽힌 ‘기독교 작가’인 C S 루이스다. 그는 ‘순전한 기독교’‘고통의 문제’‘스크루테이프의 편지’등의 책을 통해 기독인들이 고민해온 신학적 질문들에 대해 명쾌한 해답을 제시한다. ‘고통의 문제’ 등에서 그가 무신론과 허무주의에 대해 반박하는 논리는 아무리 철저한 무신론자라도 입을 다물게 할 수준이다.

 

본론

 

  1. 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를 공모함

 

  사울이 왜 죽음의 위협에까지 노출이 되었나?
  본문에서 사울은 공공의 적이 되고 있다.
  유대인들은 사울 죽이기를 공모하여 밤낮으로 성문을 지킨다.
  예루살렘의 제자들은 다 두려워하며 그의 제자 됨을 믿지 않는다.
  이 상황에 밤에 광주리에 담겨 성을 빠져나와야 할 만큼 생명의 위협을 느꼈고,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배척당하는 입장에 놓였다.

  종교는 우리는 편안한 평지로 인도할지 모르지만,
  바른 신앙은 우리를 백척간두의 꼭대기에 올려놓는다.

  YWCA 탈북자 한국적응교육에 참여한 적이 있다.
  경찰들이 사복을 입고 대거 와 있었다.
  당시 부산에서 탈북자가 자살한 사건이 있던 때였다.
  목숨걸고 북한을 나온 사람이
  남한땅에서 안주하지 못하고 극단적 선택을 한 것이 충격을 준 시점이었다.

  북한의 탈북자들이 목숨 걸고 남한으로 귀순했을 때,
  김정은에 대해서는 원수를 졌고,
  남한에서는 온전히 따뜻한 환영을 받지 못한 채
  하나원에 들어가, 사상검증을 받고, 경찰의 감시망아래서
  북한의 간첩이 아닌지 오해 받는 것과 같다.

  다메섹에서 예수쟁이를 핍박하러 가다가 만난 예수님.
빛 가운데 음성으로 들려진 음성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사울은 그 빛 아래서 눈의 빛을 잃고 시각장애인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이 일로 새로운 눈을 뜨게 된다.
  자신이 핍박한 그 예수님이 바로 약속한 메시아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했던
  그 분임을 알게 된 것이다.
  그는 그를 파견한 유대인들에게 제거대상 1호가 되었다.
  그렇다고 흩어져간 그리스도인들이 그를 환호하지 않고 경계의 눈초리를 가지고 있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 가운데 바나바가 등장한다.
  바나바는 27절에 보면
  사울이 다메섹에서 주를 본 것과 주님이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사울이 담대하게 예수님을 증거했던 일을 소개한다.
  바나바는 권위의 아들, 착한 사람,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다.
  그의 중재로 사울은 교회에 용납이 된다.
  우리 속에 관심을 가지고 세워주어야 할 무관심속에 혹은 편견 속에 있는 지체는 누구인가? 교회안에 바나바 역할을 하는 사람이 누구인가?
  바나바가 없었다면 사울도 없었다. 사울을 바울되게 이끌어준 권면자 권위자가 바나바였다. 새가족들에게 신앙의 경계선에 서 있는 자들에게 따뜻한 대변자로 나설 사람 누구인가?

 

  2. 사울이 예루살렘에서 예수의 이름으로 말함

 

  주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설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고’
  그 사람들이 사울을 ‘죽이려 힘쓴다.’
  어디서 많이 본 광경이다.
  회당에서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할 때, 스데반을 죽이고자 했던 장면이다.
  스데반이 죽었던 그 자리에 이제 핍박자 사울이 변하여 예수의 증인으로 서 있는 것이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이다.
  복음을 핍박하는 자일수록, 그가 자신의 목숨바쳐 복음을 파수꾼이 될 수 있다.
  전도해도 무관심한 사람보다 비판하는 사람이 회심하면 C.S 루이스나, 이어령처럼 복음의 기수가 될 수 있다.
  우리가 포기할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3.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감

 

  형제들이 가이사랴로 데리고 가서 다소로 보낸다.
  사도행전 9:22절과, 본문 9:26절 사이에는 최소한 3년의 시간이 있다.
  아라비아에서 홀로 시간을 보낸 후에, 사울은 다메섹으로 돌아갔고 그 다음에 예루살렘으로 갔다.

갈1:13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여 멸하고
 < 바울 자신이 회심하기 이전에 체험한 사실을 이야기 함. >
갈1:14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전통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갈1:15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갈1:16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갈1:17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갈1:18 그 후 삼 년만에 내가 게바를 방문하려고 예루살람에 올라가서 그와 함께 십오 일을 머무는 동안
갈1:19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
갈1:20 보라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이 아니로다
갈1:21 그 후에 내가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 이르렀으나
갈1:22 그리스도 안에 있는 유대의 교회들이 나를 얼굴로는 알지 못하고
갈1:23 다만 우리를 박해하던 자가 전에 멸하려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 함을 듣고
갈1:24 나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사도들은 과거의 이 박해자가 그들 가운데 하나가 될 수 있다고 믿기를 꺼려했다. 사울은 가이사랴로 피하였고 거기서 배를 타고 다소로 돌아왔다. 길리기아 지방의 다소는 사울의 고향이다(22:3) 이곳에서 여러 해를 머물렀다(갈1:21)
  사울은 여기서 바나바가 찾으러 올 때까지 기다렸다.
  우리는 성령의 일하심을 따라, 자신의 때를 기다릴 줄 아는 사울을 본다.
  우리의 아라비아사막, 길리기아 다소는 어디인가? 낯선 광야, 혹은 익숙한 동네에 오랫동안의 시간을 보낸 사울, 하지만,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있다. 그를 이방인의 사도로 스페인과 로마까지 복음으로 1,2,3,4차 여행까지 하게하시는 철저한 준비 과정이시다.
 
나를 지으신 주님 ( 내 이름 아시죠 )

1. 나를 지으신 주님 내 안에 계서
처음부터 내 삶은 그의 손에 있었죠
2. 그는 내 아버지 난 그의 소유
내가 어딜 가든지 날 떠나지 않죠
* 내 이름 아시죠 내 모든 생각도
아바라 부를때 그가 들으시죠

 

  기다림의 시간 때로 힘들고 고통스럽게 느껴질 수 있다.
  예수님을 뵈옵고 그 목소리도 듣고 분명한 증거를 얻었지만, 사울에게도 하나님의 때에 대한 기다림이 필요했다.
  우리는 얼마나 그 기다림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가?
  믿음의 영웅들의 명단을 보면, 잘 기다린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다윗 왕은 사울을 피해 아둘람 굴에서 기다렸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기에 앞서 광야에서 40년을 기다렸으며,
  다시 40년을 광야에서 방황하면서 보냈다.
  욥은 소중히 여기던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도 하나님을 기다렸다.
  엘리사벳과 사가랴는 노년이 될 때까지 기다리고 난 후에야 특별한 아이인 세례 요한을 낳았다
  사울도 이렇게 주님의 때를 기다렸다. 그 기다림 인내는, 막연한 기다림이 아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다. 약 5:11  ‘우리가 인내하는 자를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시니라.’

  복음의 가장 열정적인 반대파 사울, 그가 다메섹에서 회심하자. 교회에 돌아온 것은 무엇인가?  평안함- 외적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움/  든든히 서감- 자신의 위치를 공고함.
  성령의 도우심 받아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졌다.

 

결론

 

  우리는 교회의 어려움 속에서 교회가 더 평안하여 든든히 서가는 것을 본다. 우리 개인이나 교회에 당한 어려움이 무엇인가?
  ‘이 풍랑 인연하여서 더 빨리 갑니다.’ 찬송의 가사를 묵상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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