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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아들

로드비취 2009. 5. 7. 10:00

잃어버린 아들




눅 15장 21- 32







[21]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

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25]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26]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27]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28]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29]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30]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31]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32]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들어가며.....


천안에서 사역할 때 초보운전자의 차를 탄 적이 있었다, 국도로 진입하는 과정에 운전

미숙으로 중앙분리대를 들이박는 자동차 사고를 당한 적이 있다. 5분 이내로 달려오는
 
것이 있는데, 하나는 견인차요, 또 하나는 응급차이다. 응급차는 긴급한 환자의 이송을

돕기 위해 대기하고 있다가 달려온 것이다.


며칠 전 119 응급차의 위생 상태에 대해 조사한 영상을 보았다. 수없이 많은 환자들을
 
태우고 병원 응급실로 이송하는 이 차의 위생 상태는 어떤가 하는 보고서였다. 문고리

와 응급물품들에서 세균이 검출되고, 심지어 상관없어 보이는 응급실 앞쪽 운전자 핸


들에서도 세균이 다량 검출되어 충격을 주었다.


감염을 치료하기 위해 응급차에 몸을 실었는데, 사실 그 안에 병균이 득실대고 있었던
 
것이다.

이 뿐만 아니다. 의사로부터 치료받기 위해 병원에 입원하고 치료받는 과정에서도 새

로운 질병이나 질환을 얻기도 하는데 이를 '의원병'이라고 한다.



최근 한 성도의 어머님을 방문하며 간암 치료중 방사선 치료 28번을 하면서 십이지장

의 출혈이라는 새로운 병을 얻게되어 입원하신 것을 뵙고 왔다.


병을 치료하기 위해 병원을 찾았는데, 사실 병균이 우굴대는 곳, 새로운 바이러스에 감


염될 위험에 더 노출되었다는 것이 아이러니이긴 하지만, 그것이 또한 진실이다.






 말씀으로..




1. 교회안의 경건병




우리는 교회안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을 발견할 때가 있다.

교회가 어떤 곳인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곳이고, 성찬을 통

해 그리스도의 생명에 동참하는 곳이다. 죄로 가득찬 세상에서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곳이다. 하지만, 이런 사역에 참여하는 사람들 속에서 우리는 새로운 죄들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매주 주일마다 참회의 기도를 드린다. "길 잃은 양처럼 주님의 길을 벗어나고

마땅히 해야할 일을 행하지 않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한 것을 용서하시고, 주님의 자

비를 베푸소서" 이러한 참회자의 무리들 속에서 믿음을 가지고 예배하러 나온 사람들

속에서 우리는 새로운 죄에 노출될 가능성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자기 의'라는 병이

다. '경건병'이다.



이제 나는 예수를 믿었고, 예배도 드리고, 헌금도 하니. 다락방도 나가고 제자훈련도
 
받으니 이젠 과거와는 다른 의로운 사람이 되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피로 의롭다 칭함을 받은 것은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전혀 죄를 짓지 않고 살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의원병이 치료가 일어나는 병원에서 쉽게 걸리는 병이듯이, 경건병 자기의병은 의와
 

연관된 장소, 교회나 성경공부 모임, 기도모임에서 자주 짓게되는 병이다.





2. 큰 아들의 이야기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신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의 이야기이다.

11절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다.

그 중 작은 아들이 '제 재산 가운데 제게 돌아올 몫'을 요구한다.

재산이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 넘어가는 경우가 2가지다.

하나는, 유언에 의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아버지 생존 기간 중의 증여에 의한 것이다.

증여의 경우 재산의 소유권은 얻게되나 사용권의 아버지의 사망이후 취득할 수 있다.

그런데, 12절에서 작은 아들은 소유권뿐 아니라 처분권까지 요구한다. 그는 결국 무리

하게 요구해서 재물을 모아서 먼 나라에 가 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했다.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했다.

그는 유대인으로는 금기하는 돼지 치는 일까지 하게되었고,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다.

그때에야 아버지의 집을 생각한다.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많은데 나는 여기서 주려죽는구나.

그는 일어나 아버지께 간다.

그런데 아버지는 아직도 거리가 먼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춘다.

사실 근동지역에서 나이든 사람이 아무리 급한 지경에 있어도 달리는 것은 거의 볼수 없다.


하지만, 아들을 기다린 아버지는 달린다.

그리고, 예복을 내어 입히고, 가락지와 신을 신기고, 살진 송아지를 잡는다.

풍악과 춤추는 소리가 가득하다.




그런데, 25절을 보니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 가까이 온 큰 아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눈에 띄게 잘못한 것이 없는 아들, 규칙을 지킨 아들, 농장에서 열심히 일한 아들에 관

한 이야기 이다.

큰 아들은 자기 동생이 돌아온 일로 잔치를 베푸는 아버지에 대한 비난을 퍼 붓는다.
 
그는 돌아온 탕자에게 동생이라는 호칭도 쓰지 않는다. '아버지의 이 아들'이다.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
이 돌아오매

(30절)

이것은 경멸의 말투이다. 아버지는 '아들아' '얘야"라고 부르는 것과는 대조된다.

우리는 작은 아들이 돌아온 사건에 대해서 축복과 찬사를 보낸다. 하지만, 집 안의 아들 형은 어떤가?




이 이야기의 전 문맥
을 보자,

숫자의 비율이 줄어든다.

일 백마리 양, 일백 마리 중에 한 마리가 길을 잃었다. 목자는 그 양을 찾아 데리고 와

서 친구와 가족들을 불러 잔치를 벌인다.

열 개의 동전, 열 개중에 한 개를 잃어버린 주부가 구석구석 그 동전을 찾다가 마침 찾

아내고 친구와 가족들을 불러 즐거워 한다.

두 명의 아들, 둘 중의 하나를 잃어 버렸는데, 아버지가 그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린

다. 그 아들이 돌아오매 상거가 먼데도 아버지는 달려가 얼싸안고 축하의 잔치를 벌인

다.



하지만,
집 안에 있던 이 아들은 어떻게 된 것인가?

"잃어버린 자가 돌아왔습니다. 이제 그들과 함께 기뻐하십시오."

하지만, 과연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는가?

"아니, 그런 죄 지은 자들이 어찌 회개함으로 구원을 얻는단 말인가?

그렇다면, 지금껏 죄의 경계선에도 가지 않으려고 애쓰던 나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

가?" 이런 항변이 흘러 나오고 있지는 않는가?



이것은 선지자 요나가, 니느웨로 가지 않고 반대편 다시스로 향하게 된 이유이기도 했다.

니느웨성이 회개하는 모습을 보고, 박넝쿺아래서 투덜거리는 모습이기도 했다.

저 악한 자들은 진노 중에 멸망해야 되는 것이 아닌가?

어찌 저리도 쉽게 회개함으로 모든 것을 얻는다는 말인가?



어쩌면 우리는 다락방에서 그렇게 말하는지 모르겠다.

우리끼리 잘 모이는 다락방에 왜 세상의 때묻은 새신자들이 들어와야 하는가?

우리가 왜 그들을 기뻐해야 하는가? 왜 그들을 섬기고, 축하해 주어야 하는가?

우리 속에서 돌아오는자들에 대한 질투심과 불평이 혹시 터져 나오고 있지는 않는가?

그렇다면, 그는 집안의 탕자. 큰 아들이다.

당시의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사람은 바리새인들이었다.

그들은 착실하게 사는 사람들이었고, 그 착실한 분야는 다름 아닌 종교였다. 바리새인

들도 양과 동전과 탕자의 이야기에 박수를 보냈을 것이다.

하지만, 주님은 또 다른 아들, 집 안의 탕자 이야기를 하고 계신 것이다.

백 중에 하나, 열 중에 하나, 둘 중에 하나, 그리고 이제는 그저 하나.

모든 사람의 시선이 그 하나에, 남아 있는 잃어버린 형에게 쏠려있다. 예수님은 이야기

를 마치신다.


침묵이다. 그 큰 아들은 과연 아버지의 초대를 받아들였을까?



그것은 또한 우리에게 남겨진 질문이기도 하다.

우리는 자신을 잃어버린 자가 아니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그 잃어버린 자라고 주님은 말씀하신다.

'경건병'은 자신이 잃어버린 자라는 것을 부인하는데서 비롯된다.

특히, 소위 모태신앙으로 자라온 사람들, 무난하게 신앙생활이라는 습관에 젖어 있는
 
사람은 자신이 경건한 삶을 살아왔다고 생각한다.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녔고, 헌금을 내고, 성경대로 살고 나름 착하게 살아왔다고 항변

할 것이다.


내가 무슨 잃어버린 자인가? 나는 교회를 벗어난 적이 없는 사람이다.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 잘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 기도회며 성경공부모임 봉사모임에

열심히 참석하는 사람들, 그들은 내가 잃어버린 자일 수 있는가? 라고 반문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사람도 어딘가 헤매고 있는 어린 양 못지 않게, 떨어뜨린 그 어느 동전 못

지 않게, 그 어느 탕자 못지 않게 길을 잃은 자들이다.



3. 분노하는 아들


큰 아들은 화가 나서, 집으로 들어가려고 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와서 그를 달랬으나 그는 분노속에 있다.

아버지가 그에게 말한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지 않느냐?

또 내가 가진 모든 것이 다 네 것이 아니냐? 너의 이 아우는 죽었다가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으니,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느냐?”

아버지는 작은아들의 귀향 뿐 아니라 큰 아들의 귀향도 역시 원하고 있다.

그 분은 두 사람이 한 식탁에 앉아서 자신과 더불어 기쁨을 나누기 원하신다.

작은 아들은 스스로 용서의 포옹 속으로 들어왔지만, 큰 아들은 뒤에 서서 아버지의 자


비로운 모습을 보면서도 아직 자신의 분노를 삭이지 못하고 아울러 아버지의 어루만

져 주심을 외면하고 있다.


그 아버지의 사랑은 억지로 사랑 받는 자가 되도록 강요하지는 않는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우는 자는 복이 있나

니”라고 말씀하신다. 눅6:20-21

그런데 과연 우리는 가난한 자이며 주린 자이며 우는 자인가?

우리는 바리새인과 서기관 속에 섞인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아야 한다.


우리는 물질적으로도 절대 빈곤국가에 비해 풍요하고,

영적으로도 일본이나 이슬람권에 비해 풍성함을 누리고 있다.


우리에게 주림과 울음보다 잔치와 웃음이 더 익숙해져 있지 않은지 모르겠다.


하나님은 큰아들보다 작은 아들을 더 사랑한 것이 아니다.

아버지는 작은 아들에게 한 것처럼 밖으로 나아가 큰 아들에게 가서 들어가자고 설득하면서


[31]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 아니냐? 고 하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내 아들”이라고 부르신다. 여기 아들이라는 말은 ‘아가’라는 어투이다.

큰아들을 야단치거나 비난하거나 하는 모든 평가를 다 접어두고 그 아버지는 아들과 친밀한 관계임을 강조하신다.

큰 아들이 분노에 휩싸여 아버지께 불평을 늘어놓는 일은 놀랄 일이 아니다.

나는 이렇게 여러 해를 두고 아버지를 섬기고 있고 아버지의 명령을 한 번도 이긴 일이 없는데,

내게는 친구들과 함께 즐기라고,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주신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서 아버지의 재산을 다 삼켜버린 이 아들이 오니까, 그를 위해 살찐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이 말은 그의 상처를 표현한다. 그의 자존심은 아버지의 기쁨에 의해 여지없이 고통스런 상처를 입었고, 자기 자신의 분노 때문에 돌아온 탕자를 자기 동생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30]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당신의> 이 아들”이라는 말에서 그는 자기 아버지 뿐 아니라 동생에게도 거리감을 두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그는 자기 동생을 멸시의 눈으로 내려다 보고 있다. 죄인으로,


또한 자기 아버지를 두려움을 가지고 올려다 보고 있다. 종의 주인으로. 자신의 노동력을 착취하고 충분히 보상해 주지 않는 엄한 주인으로 말이다.

종으로서 주인을 섬기는 자리는 어떤 것인가?

거기에서는 모든 것이 자연스러움을 잃어버린다.

모든 것이 의심의 대상이 되고, 부자연스러우며, 계산적이 되고 비판으로 가득 찬다. 더 이상 신뢰란 존재하지 않는다.

작은 동작 하나하나까지도 역동작을 불러일으키며, 사소한 말 한마디도 따지고 들며, 작은 움직임까지도 평가되어진다. 여기에서 도망할 수 있는 비상구는 없다. 아들은 자신의 아들 됨을 잃어버렸고, 종의 마음으로 아버지를 대하고 있는 것이다.

잃어버린 자는 어떻게 찾게 되는가? 반드시 나에게 다가온 목자가 나를 발견하고 집으로 데려다 주어야만 한다.

[31]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32]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우리 속에 있는 큰 아들의 모습을 어떻게 바꾸어 놓을 수 있을까? 우리를 얼어 붙게 만

드는 분노로부터 자유롭게 될 능력이 우리에게는 없다.

신뢰와 감사의 훈련을 매일 같이 반복하고 구체적으로 실천함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발견하시고 자신의 사랑으로 우리를 치유하시도록 해야 한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도록 그분과의 관계를 먼저 회

복해야 한다.



'아바아버지 나를 안으시고..'



또, 우리는 작은 아들을 용서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나를 거부했던 사람에게 전화를 거는 것, 사랑의 말을 건네는 것이 바로 신뢰와 감사로
 
발돋움하는 것이다.

신앙의 도약은 사랑의 보답을 기대하지 않고 사랑하는 것, 받기를 바라지 않고 주는
 
것, 초대받기를 소망하지 않고 초대하는 것, 붙잡아 주기를 바라지 않고 붙잡아 주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주


기도문의 능력을 맛보게 될 것이다.



우리 아버지 품으로 돌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