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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40장 꿈의 주인

로드비취 2009. 1. 24. 10:38

창 40:16-23

꿈의 주인

김광영 목사





떡 굽는 관원장이 술 맡은 관원장의 꿈에 대한 요셉의 해석을 듣고, 그 해석이 좋은 것을 보고 자신의 꿈도 내 놓는다.

꿈의 내용인즉, 내 머리에 흰떡 3광주리가 있고, 그 윗 광주리에 바로를 위해 만든 각종 구운 음식이 있는데, 새들이 와서 내 머리의 광주리에서 그것을 먹어 버렸다.

요셉은 해석한다. 사흘 안에 바로가 당신의 머리를 들고, 당신을 나무에 달리니 새들이 당신의 고기를 뜯어 먹으리이다.

당신을 나무에 달리니 NIV "hang you on a tree" 좀 더 정확히 말한다면, 말뚝에 내건다는 것이다. 요셉은 떡 굽는 관원장에게 가혹한 형벌을 예언한다. 처형되고 걸려 전시되는 끔찍한 죽음이다.

요셉은 술 맡은 관원장에게 길한 예언도 했지만, 떡 굽는 관원장에게 불길한 예언도 서슴치 않는다. 왜냐하면, 요셉은 그 해석이 자신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

현대사회 사람들은 자신에게 좋은 이야기 길한 징조만을 이야기 해 주기를 바란다. 그런 그들에게 그들의 치부를 드러내거나, 심판을 말한다면 등을 돌릴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는 성경의 이야기에 더하거나 뺌이 없이 솔직한 진실만을 이야기 해 주어야 한다. 그것이 비록 우리에게 ‘불편한 진실’이 되더라도 말이다.

성경의 이야기가 바로 이 심판의 이야기 이다. 모든 사람이 죄인이며 죄인은 심판을 벗어날 수 없고, 오직 예수님만이 구원자 되신다는 진실이다. 우리는 사람들이 듣기 싫어한다고 해서 진실을 말하기를 회피하고 있지는 않는가?

또한, 성경에 많은 예언자들이 나온다. 하지만, 우리는 성경을 가려 읽는 경우가 많다. 복된 말씀 긍정적인 말씀만 보려한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의 상처를 감싸 안지만, 우리의 속을 뒤틀리게 하고 힘들게 하는 말씀도 있다. 우리는 우리의 취향대로 그것을 선택해서는 안된다. 하나님 말씀 앞에 우리 자신을 두어야 한다. 성령이 성경을 통해 우리자신의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도록 하여야 한다.

성경의 소선지서의 말씀을 읽고 있으면, 하나님의 심판이 눈앞에 온 듯 우리의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나훔 1:2-3) 『[2] 여호와는 질투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진노하시되 자기를 거스르는 자에게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자기를 대적하는 자에게 진노를 품으시며 [3]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권능이 크시며 벌 받을 자를 결코 내버려두지 아니하시느니라 여호와의 길은 회오리바람과 광풍에 있고 구름은 그의 발의 티끌이로다』

그런데, 가장 설교가 되지 않는 본문중의 하나가 소선지서이다. 성경은 창세기만 있는 것이 아니다. 복음서만 있는 것도 아니다. 66권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 말씀을 골고루 섭취하여야 한다.

우리는 자신의 몸의 상태를 정확하게 말해주는 의사를 찾아 치료를 해야지, 듣기 좋은 말만하는 의사를 찾아서는 되지 않듯이, 우리의 진상을 솔직히 드러내 주는 하나님의 말씀앞에 우리자신을 내려 놓아야 한다.

어느 목사님이 대 기업의 간부들에게 설교할 일이 있었다고 한다. 그가 성경의 많은 본문중에 ‘어리석은 부자’에 관한 본문을 하나님 말씀으로 깨닫고 증거했다. 경제에 있어 눈 밝은 사람들에게 하나님께 부요치 못한 어리석은자의 모습을 생각케 하는 말씀이었다.

청중의 입장에서는 불편한 말씀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그 말씀이 그들에게 들려져야 될 말씀으로 묵상되었기에 과감하게 선포했다. 그 때에 한 간부가 와서 말했단다. 지금까지 우리에게 와서 축복에 말씀을 전해준 설교자는 많았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우리의 어리석음을 정확하게 깨닫게 하는 말씀을 전해준 설교자는 별로 없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증거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하고 있는가?

바울은 갈라디아서에 이렇게 기록한다.

갈1: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이다.”

요셉은 그랬다. 길한 것이든, 불길한 것이든, 있는 진실 그대로를 말해줄 줄 알았다.

그런데, 그 사흘 후가 바로 바로의 생일이었다. 그때 잔치가 베풀어지고, 술 맡은 관원장, 떡 굽는 관원장이 출옥한다. 그런데, 요셉의 해석대로 술 맡은 관원장은 그 전직을 회복하되, 떡 굽는 관원장은 나무에 매달려 죽임을 당한다.

한편, 우리는 요셉의 상황에 주목해 보자.

보디발은 관원장들이 자신이 관리하는 감옥에 들어왔을 때 잘 대해줄 필요를 알았다. 향후 이들이 때문에 정치적 입지에 영향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요셉의 일처리와 인격을 지켜본 보디발이 그에게 그들을 수발하는 일들을 맡긴 것이다.

요셉은 이 감옥학교를 통해, 애굽 전체를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을 자신도 모르게 갖추어 나갔다. 감옥이 곧 학교요 훈련장이었다. 하나님은 자신의 시간에 요셉을 애굽의 총리로 세우기 위해 2년동안을 더 그곳에 머물러 있게 하셨다.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지 않고 잊어 버렸지만, 그 잊어버린 시간에도 주님은 요셉을 준비시키는 시간으로 사용하셨다.

다음장 창세기 41장에서 바로는 꿈을 꾼다. 그리고, 해석할 자를 찾는다.

그때에야 술맡은 관원장이 바로앞에서 자신이 갇혔을때을 떠올린다.

“ 그 곳에 친위대장의 종 된 히브리 청년이 우리와 함께 있기로 우리가 그에게 말하매 그가 우리의 꿈을 풀되 그 꿈대로 각 사람에게 해석하더니, 그해석한 대로 나는 복직되고 그는 매달렸나이다.(창41:12-13)”

이에 바로가 사람을 보내어 요셉을 불렀는데, 창41:36을 보니 요셉이 애굽 왕 바로 앞에 설 때에 ‘삼십세’라고 기록한다. 하나님의 시간이 찼을 때, 그가 애굽의 총리로 일할때가 온 것이다. (애굽에서는 만 30세가 되어야 고급공무원으로서의 자격이 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