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기다림의 시간에 묵상할 말씀 시 130편

카테고리 없음

by 로드비취 2009. 1. 5. 07:24

본문

시 130 편

파숫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Pastor Kim, Kwangyoung



◈ 들어가며


우리에게 참으로 시간이 가지 않을 때가 언제인가? 무엇인가를 간절히 기다릴 때 그 기다림의 시간은 일반적인 시간보다 시계추의 무게는 더 나가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병든 사람이 병에서 놓이기를 기다릴 때

중요한 시험을 쳐 놓고 합격발표를 기다릴 때

우리에게 시간은 똑같은 무게가 아니다. 어떤 싯귀에 보니 사랑하는 사람이 마주앉은 시간은 귤 반쪽처럼 지나간다고 했다.

반면, 교통 접촉사고가 나서 시시비비를 따지는 불편한 사람과의 만남은 1분도 1시간처럼 느껴질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이 된다는 것은 고통을 겪는다는 것이다. 욥기에서 욥은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났나니 불티가 위로 날음 같으니이다.’

고뇌는 인간의 전유물이다. 동물도 상처를 입을 수 있지만 고뇌하지는 않는다. 고뇌는 상처에 보태지는 아픔이다.

우리는 고난 앞에서 버림받은 느낌, 추방되고 인간폐기물이 되는 듯한 느낌을 갖기 쉽다. 오늘 시편 130편이 묘사하는 대로 깊은 곳 (바닥)까지 떨어지는 것을 경험한다.


◈ 중심에서


1. 주께 부르짖음


시인은 어디에서 무엇을 부르짖는가?

내가 깊은 곳에서 주께로 불러 아뢰니...

-> 깊은 데는 혼돈으로 가득 찬 깊은 바다를 가리키며 하나님과 분리된 죽은 자의 장소 스올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우리 문화는 누구나 영원토록 건강하고 행복하기만을 꿈꾸는 시대이다. 사람들이 절대 고난을 당해서는 안되는 것처럼 그리하여 고통의 체험을 평가절하해 버린다.

하지만, 복음은 고난에 대해 다른 견해를 제시한다.

우리는 고난을 통해 깊은 데로 들어가게 된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본질에 다가서는 것이며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께 가까이 가는 것이다.

이렇게 시편130편은 고통과 격렬하게 씨름하는 자의 노래인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고통을 회피하는 자가 아니다. 도리어 고통을 직시하고 이겨내기로 마음먹는 사람이다.

제자훈련 필독서 ‘내명세계의 질서와 영적성장’의 저자 조지 맥도날드는 말했다.

“하나님의 아들이 죽기까지 고난을 받으심으로 인간에게 더 이상의 고난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이제 인간도 그분과 같은 고난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시인은 깊은 곳에서 주께서 내 소리를 들으시며 나의 간구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시길 간청한다.

-> 깊은 곳은 절망의 장소, 탄식의 장소, 분노의 장소이다. 하지만 시인은 그 곳을 간구의 장소로 바꾸고 있다.

-> 깊은 곳, 자신의 목소리를 알아차릴 이 하나 없는 그곳에서 부르짖는 자신의 소리에 귀 기울이시길 부르짖는다. 그것은 바로 여호와께서 주가 되시기 때문이다.

시편 130편에서 시인은 자신의 고통을 하나님 안에 푹 담그고 있다. 모든 고통은 기도의 형식으로 표출된다.

오늘 우리의 고통은 어떤가? 하나님께 나갈 기도의 기회로 승화되고 있는가? 아픈 아기가 엄마 품에 더 안겨서 엄마의 따뜻한 사랑을 더 차지하듯이 우리의 고통이 주님을 더 가까이 만날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오늘의 기도회가 그런 기도의 현장이 되기를 바라며, 한해를 시작하는 새해특별새벽기도회가 그런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2. 주를 기다림


시편 130편을 지탱하는 두개의 굵직한 실재가 있다. 그것은
고난의 실재이며 또 하나는 하나님의 실재이다.

본문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8번 나온다.

주께 부르짖었나이다.

주여 내 소리를 들으시며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지켜 보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사유하심이 주께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려 하심이니다

내 영혼은 여호와를 기다리며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 그 이름은 바로 감찰하시며 도우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의 삶을 수수방관하고 계신 분이아니다. 그분은 이스라엘을 그 모든 죄악에서 속량해 내시는 분이시다.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주께서 죄악을 감찰하실 진데 그 앞에 누가 설수 있는가?

시인이 말하는 깊음은 인간이 당면한 고통의 심연이다. 그것은 곧 죄로 말미암는 고통이다. “악인은 심판을 견디지 못한다(시1:5)”

그 죄가운데 있는 인간이 어떻게 감히 하나님 앞에 나아갈수 잇는가?

4절의 말씀철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으로’ 그 앞에 나간다.

7절에 보면, 여호와께는 ‘인자하심’과 ;풍성한 구속‘이 있다.

공의로우사 죄를 감찰하시나 긍휼이 많으신 주님이시기에 감히 그 앞에 담대히 나갈 수 있음이다.

우리 하나님의 눈 밖에 난 시련은 없다.

(고전 10: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시인이 하나님을 기다림을 무엇에 비유하는가?

-> 파숫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숫군의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

사방에 보이지 않는 적들로 둘러싸인 파숫꾼에게 아침의 햇살은 얼마나 소중한 기다림인가?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여 사면초가가 된 상황에 어디로선가 부터 구원병이 온다는 소식은 얼마나 목마른 소식인가?

파수꾼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그가 대군을 맞아 싸우겠는가? 그에게는 기다림밖에 없다. 기다림은 소망은 이루어낸다.

(롬 5:3-5) 『[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5]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