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는 강물처럼 (RIVER RUNS THROUGH IT)
- 낚시 바늘에서 자유로움을 얻는 길
김광영
얼마 전 아이들과 ‘오륙도’에 밤낚시를 갔다. 릴낚시에 미끼를 끼우고 줄을 감아 제대로 던지기가 결단코 쉽지 않았다. 등대와 도심의 불빛 하늘의 별들이 반짝이는 어둠속 낚싯대 하나를 던져 넣고 하염없이 기다리는 중 낚싯대를 휘저으니 강한 입질이 와서 확 댕겼다. 꼬리 힘이 무척이나 강한 바다장어의 작은 종 같았다. 얼마나 입질을 세게 했고 뒤트는 힘이 센지, 입에 물린 낚시를 빼내지도 못하고 통에 담았다.
‘흐르는 강물처럼’ 이 영화는 미국서부 몬테나 주 거대한 대 협곡과 그 아래 깊고 넓은 강물을 배경으로 플라잉 낚시를 하는 낚시꾼을 드라마틱하게 담은 장면이 압권이었다. 이는 플라잉 낚시를 통해 가족사를 풀어가려던 감독의 의도와도 맞물려 있다고 본다. 플라잉 낚시 장면은 흐르는 강과 낚싯대를 던지는 한 남자의 모습, 하늘을 가르는 낚싯줄과 물살 등이 서정적으로 그려지고 있다. 물살 하나, 낚시 줄 하나 놓치지 않는다.
강변 풍경이 수려한 시골 장로교 목사에게 두 아들이 있다. 몸소 두 가지 공부를 가르친다. 하나는 낚시,하나는 글쓰기. 낚시는 창조주의 리듬을 깨닫는 공부, 글쓰기는 신의 뜻을 깨우치라는 공부. 글쓰기의 강조점은 간단함 명료함. 아들들의 글은 반으로 돌려보내지고 그 반은 다시 반으로 줄이고 또 반으로 줄이다.
낚시는 더 독특한 방식, 집 뒷마당에서 이뤄지는 실습. 메트로놈 네 박자에 따라 2시와 10시의 시침 방향 사이로 낚싯대 춤추듯 휘두르는 동작. 신의 박자를 깨달으라. 낚싯대 담그기 고기 입질의 순간 채 올리기 이런 박자에 따라 이뤄진다.
이 교육방침에 반응하는 각기 다른 아들의 모습이다. 형은 원칙대로 따른다. 아버지의 틀에 의존한다. 아우는 다르다. 왼손으로 낚싯대를 잡는다. 오른손잡이 정통의 아버지에게는 골칫거리다. 변칙을 향한 욕망,일탈, 위반에 대한 유혹이 그를 휘몰아간다. 끼니를 굶기기도 형벌로 다스리려하는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는다.
큰 도시 대학의 장학생으로 입학한 형, 대학원 공부에 박사학위로 교수가 된다. 고향 근처 전문대 겨우 졸업하여 지방신문 기자가된 동생과 마주한다. 7년 만에 돌아온 형이 아우와 강가로 간다. 낚시대를 휘두르는 아우의 동작이 다르다. 아버지가 가르쳐준 4박자도 아니고, 2시와 10시 시침의 변역에서 이뤄지는 줄 놀림도 아니다. ‘그림자 던지기’라는 독창적인 몸동작으로 자신 고유의 리듬에 날렵하게 줄을 담갔다 낚아채기를 반복한다.
형의 눈은 낚은 고기가 아닌 아우의 낚시놀림 그 자체에 낚인다. 팔딱거리는 고기에 생채기 하기 없이 바늘을 분리, 어망에 넣는 몸놀림 사이 군더더기 없다. 아우와 낚싯대 강물이 혼연일체(渾然一體)되어 흘러가는 흐름 같은 것이다. 형이 은어를 더 많이 낚았으나 동생의 낚시질의 예술성에 자신보다 동생의 우위를 느낀다.
낚시만이 아니다. 삶의 스타일이 다르다. 인디언 여자와 사귀고 인디언의 출입을 금하는 술집에 애인과 들어가 격렬한 춤사위를 날리고 끗발이 보일 성 싶은 날 월급을 몽땅 걸어 도박판에 끼어든다.
방학이 끝이 오고 고향을 떠나는 아침 총격당한 시체로 길바닥에 내팽개쳐진 아우의 소식을 듣는다. 형이 오랜 침묵 끝에 넋은 잃은 아버지께 말한다.
“손목이 무참히 으스러져 있었어요?”
"어느 손이냐?“
“왼손”
메트로놈 4박자를 거부하고 기존의 틀에 저항한 아버지의 굴레를 벗어나려 한 바로 그 손이다.
이 영화의 줄거리는 실제 인물인 노먼 매클린의 자서전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는 미국의 은퇴한 대학 교수이자 작가다. 아버지는 집에서 절대적인 존재이며, 감정 표현의 억제, 원칙의 고수, 인색한 칭찬으로 가족들을 엄격하게 통제한다. 그러나 그의 엄격함 뒤에는 문학과 아이들, 낚시에 대한 열정과 사랑이 자리한다.
영화에서 낚시는 뭘까? 부자간의 관계이다. 두 형제 모두 강력한 아버지의 이미지에 압도당하고 거기에 영향 받고 의존한다. 그러나 낚싯바늘에서 풀려날 수 있는 길은 낚시꾼 쪽으로 헤엄쳐 가서 낚싯줄을 느슨하게 한 다음 낚시 고리로부터 자유로워질 기회를 포착하는 것이다. 노먼은 아버지에게 순종하며 결국 자유를 얻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폴은 끊임없이 아버지의 규칙을 깨려 하나 그러면 그럴수록 줄은 더 팽팽해지고 갈고리는 몸 안에 더욱 깊숙이 박혀 지쳐가는 물고기와 같았다. 폴의 비극은 이렇게 몸부림치는 물고기처럼 결국 아버지를 벗어나지 못하는 데에서 기인한다.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던 아버지. 폴이 죽음 후 죽은 아들에 대해 이렇게 회상한다.
"그는 아름다웠다"
"우리는 상대방이 도움을 원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오히려 때론 그들이 원하지 않는 도움을 주곤 합니다. 그러나 우린 서로에게 도움이 될 수 없다 하더라도 서로를 사랑할 순 있습니다."
왜 제목을 ‘흐르는 강물처럼’이라 잡았을까? 노만은 마지막에 말한다.
“인생은 순간이고, 순간은 영원하지 않다.” 강물이 흐르는 것은 순간이지만 그 강물이 바위를 만들고 모래를 만든다. 협곡이나 바다도 만들어진다.
아버지의 한마디가 쑤욱 들어온 영혼의 파동을 일으킨다.
“우리는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완전히 사랑할 수는 있다.”
영화를 보며 ‘가족이란 무엇일까?’ 혹은 '교육이란 무엇일까?' 질문이 더 커진다. 서로 다른 남녀가 만난‘부부’, 서로 다른 기질과 성향의 ‘아이들’, 그리고 아이들과 부모의 관계. 그것이 흐르는 강물처럼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었으면 한다. 아마 그것은 누구나 바라는 바일 것이다.
하지만, 낚시에 걸려 파닥대는 물고기처럼 불편한 관계가 많다. 그것은 별거나 이혼이 되기도 하고 가출이나 비행이 되기도 한다. 오른손의 정통에서 왼손이 진정한 자유를 획득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안으로 감아들면 ‘구속(拘束)’이 될 것이고, 밖으로 풀어 놓으면 ‘방종(放縱)’이 될 것이다. 낚시질처럼 끊임없는 감아듦과 풀어놓음의 긴장감이 있어야 한다.
누가 이 낚시질에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자녀교육 혹은 부부관계에 왕도(王度)는 있는가? 삶을 살다보니 정답을 콕 집어 말하기 쉽지 않다. 아마 이것은 우리가 평생 풀어가야 할 숙제(宿題)가 아니라, 온몸으로 견뎌야 할 삶의 신비(神秘)인지 모르겠다.
출처 : 클릭 부산교육 _ 부산시교육청 학부모기자단 카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