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불의한 재판관과 과부의 비유
본문 : 눅18:1-8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하여 가라사대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관이 있는데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그가 얼마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주께서 또 가라사대 불의한 재판관의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 마음문을 열며
우리는 기도하지만, 낙망할 때가 많다. 삼세번 기도했는데 안되더라,
10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고 10번 기도했는데 안되더라.
100일 기도했는데, 하나님 눈도 깜짝 안하시더라.
에이 내가 왜 기도한다고 시간을 낭비하지....
기도해도 별 수 없고 하나님은 살아계시지 않은가봐!
내가 기도했는데 왜 대답이 없으시지....
우리는 기도의 응답이 보여지지 않을 때 낙망하기가 쉽다.
언제부터 기도했는데 아직도 응답될 기미가 안보이지,
내가 누구를 위해 그렇게 몇 년을 기도했는데 변화될 기미가 안보이지....
그렇다. 우리는 기도해 놓고도 낙심할 때가 많다.
구하라 그리하면 주실 것이요 찾으면 찾으리요 두드리면 열릴 것이라는 말씀이
거짓말 처럼 느껴질 것이다.
그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기도에 낙심하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포기해야 하는가
아니면, 하나님께 더 매어 달려야 하는가?
※ 본문과 씨름하며
어떤 도시에 한 재판관이 있다.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아주 교만하고 자기중심적인 성격의 소유자이다. 이 깐깐한 재판관의 성격을 이 도시의 모든 사람들이 다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다. 남성중심적인 사회속에서 과부라고 하는 것은 참으로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노출되어진 사람이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이 힘없는 과부를 괴롭게하는 자가 있었다. 그는 도저히 이 어려움에서 헤어나올 길을 찾지 못하고 감히 그 재판관을 찾아간다.
그가 재판관을 찾아가지만, 재판관이 그의 요구에 귀기울이거나 관심을 써 줄 기미가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 바늘을 찔러도 피 한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은 재판관이다. 그래서, 문전박대를 당하지만, 그래도 3절을 보니 자주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하며 간청한다. 하지만, 번번히 무시당하고 거절당하지만 그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처음에는 이 말에 코방귀나 뀌던 재판관이 얼마동안은 이 말에 귀 기울일 생각을 하지않던 재판관이 하도 와서 극성을 부리니까 마음에 변화가 생긴다. ‘아니 내가 하나님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도 무시하는 사람이지만,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하니 참으로 괴롭다.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어야겠다. 안 그러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할 것이 아내냐’
예수님이 이 이야기를 왜 제자들에게 들려주시는가? 고집스런 재판관이 가난한 과부를 무시하다가 도저히 안될 것 같아 소원을 들어준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인가? 1절에 보면, 이 비유의 목적이 분명하게 나와있다.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에 대해 예수님이 가르치시기 위해 이 이야기를 하신 것이다.
하지만, 우리주님은 이 불의한 재판관을 말을 들어보라고 하신다. 그가 가난한 사람을 돌아보지 않는다고 하나님이 벌 주시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도 없고, 사람들에 대한 동정도 눈꼽만치도 없이 안하무인으로 살아가지만, 늘 와서 자신을 괴롭게 하는 과부의 번거로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항복하고 들어주고자하는 그 말을 들어보라고 하신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처럼 사랑하시는 그 분께서 그 밤낮으로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시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냐는 것이다. 속히 그 원한을 풀어주실 것이다. 우리의 기도의 자세는 바로 이와 같아야 한다. 우리의 간구를 들어주실 능력이 있는 분이 하나님 한 분이심을 믿고, 그 분 앞에 매어달리는 것이다. 떡 세덩이를 빌리는 친구의 비유에서도 비록 벗됨을 인하여는 일어나 주지 않아도 그 강청함을 인하여서 그 요구대로 주리라고 하셨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롬8:32)’
우리가 낙망될 때 긍휼과 자비에 풍성하신 아버지의 이 말씀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여기 모인 것은 바로 그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하기 위한 것이다. 주실 때까지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이다. 우리 주님은 8절 마지막에 이 말씀을 하신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이 말씀을 믿고 기도하되 낙심치 않는 진실한 믿음을 볼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다. 끝까지 믿음의 좁은 길을 걷는 사람이 적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