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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름의 상을 향한 경주 빌 3: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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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드비취 2010. 7. 15.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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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이야기


영국의 탐험가 어니스트 새클턴은 1914년 대원 27명을 이끌고 남극대륙횡단에 도전한다. 영국의 남국대륙횡단 탐험대가 남빙양에 있는 사우스조지아 섬에서 돛을 올렸다. 이 탐험대의 목적은 최초로 남극대륙을 육로로 횡단하는 것이었다.

‘선원구함, 위험한 여행, 얼마 안되는 봉급, 극심한 추위, 몇 달씩 계속되는 어둠, 항시적인 위험, 안전복귀 장담 못함. 단 성공시 명예를 얻고 유명해 질 수 있음’

이 광고를 새클턴이 내었고, 그 광고를 보고 많은 사람들이 지원했는데 그 중에 27명이 이 여행에 동참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남극해에 진입하자마자 얼음사이에 갇혀 배는 파괴됐고, 섭씨 영하 80도를 오르내리는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며 죽음과 싸워야 했다. 634일, 약 2년뒤, 때로는 얼음산을 오르며, 보트로 거친 남극 바다를 항해하며 탐험대 전원이 살아서 귀환했다. 얼음의 땅과 바다를 2000km나 헤맨 다음이었다.







<개역개정판>

(빌 3:10-14) 『[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NIV>

(빌 3:10-14) 『[10] I want to know Christ and the power of his resurrection and the fellowship of sharing in his sufferings, becoming like him in his death, [11] and so, somehow, to attain to the resurrection from the dead. [12] Not that I have already obtained all this, or have already been made perfect, but I press on to take hold of that for which Christ Jesus took hold of me. [13] Brothers, I do not consider myself yet to have taken hold of it. But one thing I do: Forgetting what is behind and straining toward what is ahead, [14] I press on toward the goal to win the prize for which God has called me heavenward in Christ Jesus.』

1. 삼가는 것

  당시 초대교회에는 율법을 생명처럼 여기는 유대인들이 있었다. 이들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 곧 할례의 표를 강조했다.

이들이 예루살렘에서 처음 회심하고 복음전하는 자로 파송되었으나,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인이 되어야 한다고 고집했다.

바울은 이들에 대해

Watch out for those dogs라고 한다.

이방인 회심자들을 유대교로 개종시키려고 그리스도인 회중을 기웃거리는 자들 이런 모습은 바로 개와 같은 것이었다.

우리는 사도인 바울이 왜 이런 말을 쓰는지 의아해 할 수 있지만, 그만큼 잘못된 것에 대해서는 단호한 바울의 태도였다.

 

교회 안에서도 복음 아닌 다른 것을 말하는 자들이 있다. 성경 아닌 다른 것을 가르치는 자들이 있다. 성경만으로 복음만으로 예수만으로 충분치 않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들에 대해 단호하지 않는다면, 교회는 순수성을 잃어갈 것이다.

 

2. 해로 여기는 것

 

바울은 그런 유대주의자들이 자신의 육체적 할례와 종교적 열심을 주장하는 것에 대해, 자신도 그러하다고 말한다.

(4절)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난지8일만의 할례

이스라엘 족속 베냐민 지파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

율법으로는 바리새인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

바울이 이것을 열거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이런 육신적인 자랑 이것이 다 해로운 것이라는 것이다.

(7절)그러나, 무엇이든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바울은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라고 한다.

저울에 놓고, 예수님, 그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는 의가 이전의 모든 것과는 비교도 안되는 것임을, 아닌 이전의 것은 도리어 배설물로 여긴다고 했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인정받는 길을 찾았기 때문에 이전에 그가 의지하던 모든 것을 ‘해(loss)’로 여겼다. 그는 오직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모든 것보다 ‘훨씬 더 소중하다’고 결정하였다. 그는 모든 것을 해로 여겼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곧 유대주의에서, 바리새인들 가운데서, 아마도 자기 자신의 가정에서조차도 그의 지위를 ‘잃어버렸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슬퍼하지 않았다. 그 밖의 모든 것은 ‘그리스도를 얻을 수 있는 것에 비교하면 아무 쓸데없는 쓰레기’(Phillips)였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이전의 자랑들을 어떻게 하는가?

우리가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지만, 그것이 모든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와졌다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세속적인 가치관들과 갈등하고 부단히 그것과 싸우게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로켓기술자들은 추진로켓을 좀 더 크게 만들고 싶었지만 4피트 8.5인치를 벗어날 수 없었다. 2007년 8월 8일 우주왕복선 엔데버 호. 미국 유타 주 공장에서 플로리다 주의 미항공우주국 발사대까지 기차로 옮겨야만 하는 추진로켓은 열차터널을 통과하기 위해 열차선로 폭에 맞춰 설계되었다. 선로폭은 4피트 8.5인치, 전 세계 철도의 60%가 이 표준궤간을 따른다.

19세기 중반 미국에는 지역마다 다양한 규격의 열차선로가 존재했지만 남북전쟁에서 북군이 승리한 후 동북부 지역의 표준인 영국형으로 통일되었다. 19세기 초 영국은 석탄 운반용 마차선로를 일반도로에 깔아 증기열차의 운행을 시작한다.

2000년 전 유럽을 정복한 로마군은 로마전차 폭에 맞춰 유럽 전국에 도로를 건설한다.

말 두마리가 끄는 로마전차, 그 이후 유럽의 표준도로는 말 두마리의 엉덩이 폭에 맞춰 약 4피트 9인치로 설계되었다.

 

1867년 최초의 수동타자기는 속도를 낼수록 글자가 엉켜 천천히 치도록 자판배열을 설계 했다. 그것이 바로 qwerty자판이다. 65년 후 손가락 움직임을 50% 줄여주는 효율적인 자판이 개발되지만 이미 구형 자판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효율적인 새 자판을 거부했다. 이를 경로의존성이라고 한다.

 

우리가 익숙해진 관습을 벗어 버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알게 된다.

그렇다고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성령이 우리 연약함을 도우신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할 수 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여전히, 나의 가문, 학벌, 혹은 재력과 연줄 등 세상적인 것을 자랑하고 싶은 유혹에 빠지기 쉽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에게 과연 나의 참 자랑이 무엇인지 새롭게 물어 보아야 한다. 우리는 장례식에 가서 ‘모든 인생은 풀과 같과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꽃은 떨어지고 풀은 시드나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있도다’는 말씀의 의미를 알게 된다. 빈손으로 온 인생 결국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하지만, 그 인생의 끝에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가 아니겠는가? 그럼에도 교회 안에서도 세상적인 것을 자랑한다면, 과연 예수님을 만난 것인지 정직하게 자신에게 질문해 보아야 한다. 바울이 만난 예수님과 우리가 만난 예수는 다른가?




3. 달려갈 것

 

바울은 어찌하던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서 이르기를 바란다(11절). 우리에게 이 말이 이상히 들릴 수도 있다. 바울은 자신의 구원에 대해 의심하고 있는 것인가?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께 인정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확신이 없던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자만에 빠지거나 주제넘은 적이 없었다. 이 말은 의심이 아니라 겸손의 표현으로 보아야 한다.

 

이제, 바울은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고 한다.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 가노라고 한다.

푯대는 ‘주시하다’는 뜻의 스켑토마이에서 파생한 ‘스포코스’라는 단어이다. 마라톤 경주의 최종 결승점을 말하는 것인데, 경주자가 주시하는 것이 바로 이 결승점인 것처럼 우리도 신앙의 마지막 결승점을 주시하며 달려갈 것을 말한다. 축구선수라면 골대를 항상 주시하는 것이요, 농구선수라면 농구골대를 항상 주시하며 경기시간 내내 그곳의 초점을 놓치지 아니한다는 것이다.

 

바울은 이렇게 뚜렷한 목표점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과연 물에 물 탄듯 술에 술 탄듯 그저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에 만족하고 있지 않는가? 우리 삶에 목표점이 뚜렷하지 아니하면 분명한 삶의 변화를 경험하기가 쉽지 않다.

바울사도에게 있어서 그의 삶의 초점은 10-11절의 내용처럼 그리스도와 그의 부활의 권능,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예수에 관해 아는 것에 만족해 하지 않는가? 정말 예수를 알고 있는가?

우리가 축구의 박지성 선수에 관해 아는 것과 박지성 선수를 아는 것은 다른 것이다. 수많은 정보와 통계와 뉴스를 통해 박지성에 대해 아는 것과 박지성의 축구동료들처럼 함께 뛰면서 가까이서 직접 아는 것은 다른 것이다.

바울은 예수님에 관한 앎이 아닌, 예수님 자신을 알기를 원했다.

롬6: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음을 본받아 연합하는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롬 8:13 그의 영광에 참예하기 위해 고난에 참예할 것이다.

우리가 아는 예수는 과연 어떤 예수인가? 바울사도가 그의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다는 것을 과연 무엇을 말한 것이었을까? 우리를 과연 그리스도를 친밀하게 아는 것에 우리의 초점이 있는가? 그것을 위해 그의 고난에 동참하는 자가 되고 있는가?

 

달려간다는 이 말은 문자적으로는 ‘추구한다’는 뜻이다. 그는 교회를 핍박하는 사실을 말할 때 이 단어를 사용하였다(6절). 그는 여러 해 전에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그리스도께 붙잡힌 바 된 그 큰 목적을 ‘잡기’를 원했다.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는 사람의 모습이다.

고전 9:24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찌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그리스도인들은 과거에 하나님이 하신 일들을 기억해야 하지만, 과거에 매달려서 살아서는 안 된다. 오히려 앞에 있을 것을 잡기 위해 달려가는 태도가 필요 한다.

달려간다는 단어는 경기하는 모습이나 전차 경주에 적용될 수 있는 단어이다. 그는 자신의 삶 전부로 그리스도께 포커스를 맞추었다. 우리의 상급은 무엇인가? 오직 주님을 바랄 수 있는 영성을 회복하도록 기도하자.

 

우리의 신앙은 화려한 과거의 이력을 나열하는 것이 되어서는 되지 않을 것이다. 이전보다 더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새로운 역사들을 써 가야 할 것이다. 월드컵을 말할 때 2002년 한일월드컵 4강의 놀라운 사건을 말하고 그냥 과거의 향수에만 매여 있어서 되겠는가? 이번 남아공 월드컵에서 축구대표팀은 사상 원정 16강 첫진출이라는 새로운 역사를 쓰지 않았던가? 우리 개인의 삶에서도 우리 교회의 역사에서도 우리는 믿음으로 새로운 역사를 써 가야 한다.

올해도 주일학교 여러 부서에서 여름성경학교며 수련회가 있다. 그리고, 이를 위해 특벽새벽기도회를 이 주간 갖고 있다. 청년부는 1달 저녁기도회를 갖고 있다.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없기에 성령의 도우심을 의지하는 것이다. 우리는 과연 수련회와 성경학교를 준비하며 새로운 믿음의 역사를 써 갈 것에 대한 기대가 있는가? 아니면, 1년 행사로 의례히 하는 단지 또 하나의 여름 수련회일뿐인가?

주일학교 교역자와 교사만이 아니라 온교회가 함께 이 믿음의 경주를 응원하며 기도로 적극적으로 후원해야 할 것이다.

 

우리에게 주님이 주실 상급을 바라보며 위대한 꿈들을 꾸고 주님다시오실 때까지 달려가야 할 것이다. 비록 우리 앞에 눈에 보이는 성취가 당장에 드러나지 아니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믿음의 순종의 경주를 최선을 다해 달려가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참된 완전은 ‘완전에 도달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 자체에 있다. 우리 찬양의 가사처럼 예수를 다 닮지 못해도 나 닮아가리라는 목표로 부단히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뒤를 따르는 순종과 성실이 중요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