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얍복강의 야곱

영혼의 양식

by 로드비취 2011. 3. 14. 0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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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루어 이긴 자

 

그 사람이 가로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 (창32:28)

 

<개역개정판>

 

(창 32:28)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NIV>

 

(창 32:28) 『Then the man said, "Your name will no longer be Jacob, but Israel, because you have struggled with God and with men and have overcome."』

 

1. 쌍둥이 형 에서를 경쟁의 상대로

 

그는 '어출쌍생'이었다. 어머니 리브가의 뱃속에서부터 형 에서와 싸웠던 인물이다.

얼마나 자주 싸웠던지 리브가가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에 대하여 하나님께 물을 정도였다. 그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야곱이 경쟁적인 인생을 살게 될 것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창25:23)

뱃속에서도 경쟁하던 야곱은 쌍둥이 형 에서의 발꿈치를 붙잡고 간발의 차이로 태어났고, 단 몇 초 때문에 동생이 되어야 했다. 간발의 차이로 장자의 권리를 차지할 수 없었던 야곱은 아마 쌍둥이 형 에서를 늘 경쟁의 상대로 여기며 성장했을 것이다.

마침내 기회가 찾아왔을 때 그는 팥죽 한그릇으로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날 내게 팔라”고 흥정을 시작했고 그렇게 하겠다고 하자 팥죽을 받기 전 먼저 “내게 맹세하라”고 요구한다. 아버지가 축복하는 결정적 기회가 왔을 때 그는 어머니 리브가의 도움을 얻어 에서에게 주어질 축복을 가로채기까지 하며 그 형과 경쟁하던 사람이다.

야곱의 경쟁적인 모습은 얍복시냇가에서 어떤 사람과 밤새도록 씨름하는 것에서 절정을 이룬다.

 

모든 소유물과 두 아내와 두 여종 아내 그리고 열한 아들들까지 다 건네고 자신만 혼자 남아 날이 밝도록 씨름한다. 그러자 그 사람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알고 야곱의 환도뼈를 쳐서 위골시켜 버렸다. 위골되어 느끼는 극심한 통증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그를 붙들고 늘어졌다.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창32:2 6)

이 얍복 나루터 근처에서의 씨름은 야곱을 경쟁심으로부터 자유함을 얻게하는 축복의 사건이었다.

그 사람이 가로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 (창32:28)

 

이 사건에 그는 형 에서를 만나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 형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이다” (창33:10)고 고백한다. 경쟁의 상대에서 화해와 용서의 상대로 변한 그들에게는 “목을 어긋맞기고 입맞추고 피차 우는” 경험이 가능했다.

2. 자수성가한 야곱

 

이같은 경쟁 심리 밑에 깔린 동기는 무엇이었는가?

에서의 ‘주어진’ 권리와는 달리 야곱은 ‘획득하고, 노력해야하며’ 심지어 ‘속이기까지 해야 얻을 수 있는 환경’이 그를 경쟁의 심리로 이끌었다.

거짓과 속임수를 사용해서라도 자신의 추구하는 바를 획득하려고 했던 야곱의 옛 모습은 하나님과의 직면에서 깨어졌고 하나님과의 진정한 관계가 회복되어지는 이스라엘로서의 모습으로 서서히 변화되어가게 되는 것을 알 수 있다.

3. 거짓의 사람 야곱이 하나님을 만남

 

어떤 수를 써서라도 이기려고 하는 압박감은 우리를 종종 거짓으로 이끈다. 시험에서 조금이라도 남들보다 나은 성적을 얻기 위해 혹은 최악의 상황을 면하기 위해 컨닝을 하는 경우가 종종있다.

야곱의 삶에도 우리의 이 어두운 면이 있다.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남을 이용하기도 하며 필요할 때는 도움을 청하다가도 더 이상 도움이 필요없을 때는 과감히 박차는 나오는 모습이 야곱의 삶에서 삼촌 라반과의 관계에서 발견된다.

 

생전 처음으로 부모를 떠나야만 하는 상실감은 외외로 컸을 것이다. 두려움과 외로움 그리고 불안감에 휩싸인 채 하란을 향하여 지팡이를 잡고 떠나가는 사십대의 청년 야곱의 앞에 어떤 일이 펼쳐질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다.

 

하란으로 가는 도중에 한 곳에 밤에 돌을 베개삼아 잠이 들었을 때 하나님께서 꿈을 통하여 자신을 드러내셨다. 전혀 예측치 않았던 시기와 장소에서 그는 ‘큰 꿈’을 꾸었고, 그 꿈은 불확실한 야곱의 미래에 희망을 던져주었다.

 

이 벧엘 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야곱이 하나님의 집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야곱이 있는 곳을 찾아왔다는 것이다.

꿈에 본즉 사다리가 하늘에서부터 자기가 누운데까지 닿았는데 천사들이 오르락 내리락 하고 그 위에 하나님이 서 계신다. 이 사다리는 야곱이 놓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놓으신 것이다. 내려오시려고 놓으신 것이다.

하나님은 약속하신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찌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하지만, 야곱의 인생을 살펴보면, 형을 속여야했고, 하란으로 도망해야 했고, 하란에서 부인을 넷씩이나 얻어야 했으며, 외삼촌의 삯을 10번이나 변역하는 속임가운데 있어야 했고, 집에 돌아올 때도 에서가 군사 400명을 거느리고 야곱을 향해 칼을 갈고 있었다.

 

그는 말년에 사랑하는 아들 요셉을 잃고 애굽에 내려가 애굽왕에게 이런 말을 한다. “내 나그네 인생이 내 선조들의 나그네 인생길에 미치지 못하오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왜 야곱은 이런 고생이 있어야 했을까?

예수믿고 사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 중 어느 편이 더 편할까? 그것은 바로 믿지 않는 사람들이다. 부모 없는 아이와 같기 때문이다.

누가 아침에 깨우기를 하는가? 세수를 하라고 하는가? 학교를 가라고 하는가? 무슨 숙제 검사를 하는가? 부모를 가진 아이는 아침에 깨우는 분이 있고 세수를 하라고 요구하고 머리를 단정히 하라고 하고 존댓말을 하라고 하며 다그친다. 이것 참 힘들다.

그 중에서 가장 힘든 것은 이 세상에 보이는 복이 진짜 복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시키는 하나님의 인도이다. 세상의 실패를 경험함을 통해서 이 세상에 발붙일 곳이 아니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시는 것이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이 저토록 편안하게 살도록 내버려 두시는 이유는 그들은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고달픈 이유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그에게 하란을 갔다 오는 것 없이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실 수 있는 분이다. 그러나 땅을 얻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 땅을 소유할 수준의 사람이 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야곱으로 이 과정을 통과케 하신다.

 

이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겠다”고 하시고는 이제 그땅을 소유할 능력 뿐만 아니라 그 수준의 사람으로 야곱을 만드시는 것이다. 하란으로 유학보내시는 것이다.

합격하면 이 땅을 주고 합격하지 않으면 안 주겠다는 뜻이 아니라, 돌아오게 할 것이다. 훈련과 시험중 어느 것이 어렵는가? 훈련이 어렵다. 시험은 합격과 불합격이 있어 어려워 보이지만 합격하면 합격이고 불합격하면 불합격이기에 오히려 쉽다. 훈련은 목표할 때까지 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렵다.

“내가 너를 이 땅에 돌아오게 하겠다”는 말은 겁나는 말이다. 흐지 부지가 없다. 되도록 하기까지는 잠 안 재우고 휴가도 없고 외출 외박도 없다.

 

이 부분에서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시는 모습을 보여주신다. 그 사랑은 내가 사랑하는 대상으로부터 나도 사랑을 받아내겠다는 수준이다.

 

사랑은 굴복을 요구하지 않는가? 칼을 꽂아 놓고 “나랑 결혼하면 칼을 거두고 그렇지 않으면 벨 것이다”고 하는 것을 사랑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것은 강도라고 한다. 사랑은 자발적으로 나를 사랑해 줄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붙잡아 놓고 천국과 지옥을 보여주시고는 어느쪽을 가려느냐 물으면 훨씬 쉽다.

 

주일날 예배 안오고 딴 곳에 있을 때마다 사건을 하나씩 터뜨려 주시면 “이러면 안 되는 구나” 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그렇지 않다.

 

예를 들어 가시 철망을 다 쳐서 오직 한 길만을 뚫어놓고 이길 이외의 길을 가면 죽는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모든 길을 열어 놓고 가고 싶은 대로 다 가게 해 놓고 싸우는 사랑의 자존심 싸움이다.

이제 우리는 벧엘에 서 있다. 벧엘은 야곱의 끝이 아니라 이제 시작이다.

그는 가서 하란에서 이십년간 생고생을 해야 한다. 그리고 돌아오면서 야복 나루터 사건을 겪어야 한다.

그의 딸 디나가 강간당하는 사건을 경험하고, 아들 요셉을 잃어 버리고, 말년에는 기근을 당하여 남의 나라까지 내려간다.

그러나, 이 인생을 보며 우리가 놀라는 것은 하나님은 기어코 우리를 만들어 내시는데 야곱의 수준까지 만들어 내신다는 사실이다.

 

 

4. 얍복나루의 씨름

 

몽땅보내고 마지막으로 아내와 자식들도 앞서 보내고 혼자만 남았다. 참 꾀를 잘 쓰고 있다. 모든 것을 잃고도 아직도 그가 최후의 순간까지 자기 인생이 자기손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이 직접 간섭하러 내려오셨다. “내가 네 인생의 주인이다. 너의 인생과 목숨은 내것이다” 이것을 확인시키려고 그 씨름을 하신다. 그런데, 야곱은 항복하지 않는다. 자기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잘 먹고 잘 살아라”고 그의 환도뼈를 치고 가신다. “내가 떠나면 너는 끝이다”라는 심판을 선언하고 가신다.

거기서 비로소 야곱이 무릎을 꿇는다. 그는 하나님이 자신을 축복하지 아니하시면 그 분의 은혜가 아니면 자신은 스스로 설 수 없는자임을 시인하며 항복하고 있다.

 

그러자 하나님은 “네 이름이 무어냐”고 묻는다. 야곱이라는 이름은 사기꾼에 약탈자요 강도이다. 그는 자신의 정체감이 더 이상 회개할 수 없는 차원까지 낮아졌다. 완전 바닥을 기고있는 자신의 솔직한 자아를 드러낸다. 그때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주신다. 이것은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은 도대체 어떤 분인지 모르겠다. 나에게 무슨 잘못이 있어 이런 어려움을 허락하시는가” 하지만, 가장 중요한 싸움의 본질은 우리가 아직도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씨름을 하시고 환도뼈를 부러뜨리시기까지 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라, 그것은 심판도 아니고 포기도 아니고 분노도 아니고 그것은 사랑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고집쟁이가 바로 야곱이다. 성경에 야곱만한 사람이 없다. 그런데 그 야곱을 항복시키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를 얍복 나루터에 세우고야 마신다. 거기서 항복하지 않자 씨름하러 내려오신다. 그래도 안듣자 부러뜨리신다. 그래도 안들었다면...? 머리털을 다 뽑았을지도 모른다. 항복할 때까지 하신다. 우리가 한번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이상 절대로 놓치지 않으신다.

 

그는 사랑하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까지 십자가에 다신 분이시다. 그의 사랑은 너무도 지독하신다.

기어코 하시고야 마는 것이다. 예수 믿는 자는 꼭 하나 항복해야 할 것은 더 이상 절망이 없다는 것이다.

“나는 이제 끝이야, 나같은 사람도 하나님이 더 이상 돌보실 것인가” 그런 말은 없다.

 

그는 그 어떤 것을 감수하고라도, 뛰어 넘어서라도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만드시고야 마는 고집을 가지신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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