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자의 귀향
눅 15장 11절~20절
렘브란트의 초상
렘브란트는 1666년에 1667년사이, 인생의 황혼기에 <탕자의 귀향>을 그렸다. 암스테르담에서 이름을 알렸던 당대의 미술계 거장이다. 특히 초상화를 잘 그렸는데 당대의 거물들이 앞다투어 초상화를 그려달라고 부탁했다.
이런 렘브란트의 인생이 차츰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먼저 아들을 잃었다.
이어서 큰딸이 세상을 떠났다.
곧 작은 딸도 목숨을 잃었다.
이번에는 아내가 숨을 거두었다.
그 후 함께 살던 여성은 정신병원에 갇혀버렸다.
다시 결혼했지만 두 번재 아내 역시 먼저 떠나버렸다.
재물과 명성을 모두 잃어 버렸다.
세상과 작별할 날을 얼마 앞두고 아들, 티투스 마저 앞세웠다.
어마어마한 상실을 온몸으로 살아내는 한편 잇달아 세상을 떠나는 가족들과 함께 조금씩 죽어간 렘브란트였다. 하지만, 이 상처를 <탕자의 귀향>이라는 작품으로 그려내었다. 이것은 젊고 잘 나가던 시절에 만들 수 있는 작품이 아니었다. 한 아이를 제외한 모든 자식과 두 아내를 그리고 전 재산과 명예와 인기를 다 잃어버린 뒤에야 눈 먼 아버지의 따뜻한 모습을 정확히 표현해 낼 수 있었다.
비극이란 비극을 다 겪고 나서 비로소 <탕자의 귀향>을 그릴 힘이 생겼으며, 하나님의 사랑의 실체를 꿰뚫어 볼 수 있는 내면의 화실에서 그 걸작을 완성했다.
탕자의 귀향 그림
빈센트 반 고흐는 렘브란트의 이 작품을 보고서
“수없이 죽음을 맛보지 않았더라면, 결코 이런 그림을 그리지 못했을 거야”라고 말한다.
성경의 누가복음 15장의 예수님의 비유에 등장하는 탕자의 이야기를 고스란히 자신의 삶의 여정과 함께 이 그림에 담아본 것이다.
15장 11절-32절의 내용에 두 아들과 한 아버지의 모습이 등장한다.
11절은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어...로 시작한다.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이 둘째아들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집을 나가서 내키는 대로 지내보고 싶어, 이래라 저래라 하는 소리 좀 안 들었으면 좋겠어. 두고 봐. 엔젠가는 내 몫을 챙겨서 달아나고 말테니!”
간단히 말하면 “부모님의 잔소리 없이 내 식대로 살고싶다.”는 것이다.
장바니에는 <인간되기 Becoming Human>에서 이렇게 말한다.
“참으로 역설적인 상황이다. 인간에게는 상충되는 욕구가 있다.
한편으로는 자신보다 더 큰 무언가에 소속되고 틀에 맞춰가며 그 일부가 되려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내면 깊숙이 숨어 있는 자아를 일으켜 세워서 최소한 얼마동안이라도
위험을 감수해가며 익숙하고 편안한 상황을 뒤로 한 채 홀로 걷고 싶어 한다.
인간이 가진 이 두 가지 상대적인 충동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절충점을 찾아야 한다.“
아버지 어머니는 무엇이 옳은지 알고 어떻게 말하고 무얼 먹어야 할지 잘 알고 있다. 세상을 더 오래 산만큼 안다. 그래서 부모들이 자녀들에 대해 염려하는 것은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것이다.
하지만, 자녀들의 마음 속 목소리는
“그만하면 됐어, 이건 내 인생이야! 남의 것이 아니라고, 날 좀 냅 둬!”이다.
이 감정역시 자연스럽고 정상적이다.
“누군가가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을 가르쳐 주는 것은 싫어.
지금 내게 필요한 건 집을 떠나서 여기저기 여행하며 마음대로 행동하는 거야.
날 좀 내 버려둬.“
‘학습’이 아니라 ‘체험’을 통해 시행착오를 통해 신앙과 삶을 찾아가겠다는 당돌한 요구이다.
그런데, 아버지의 이 아들의 당돌한 요구를 허용하신다.
“당장 나가라! 이젠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 못된 녀석 같으니라고, 지옥엘 가든 말든 난 상관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지 않으신다.
왜일까? 왜 야단치거나 다리몽둥이를 부러뜨리지 않고 ‘아버지가 그 살림을 나눠주었고’ 둘째 아들이 떠나가도록 하신 것일까?
상처입은 새를 부드럽게 감싼 모양을 보자.
너무 꽉 쥐지도 않고, 그렇다고 완전히 놓아 버리지도 않는 모습니다.
이렇게 에워싸는 두 손은 “내가 너를 사랑하므로 잘 붙잡아서 안전하게 지키고 있다. 절대로 떠나가지 않을테니 걱정 말아라”고 말하는 손이다.
이 손의 또 다른 의미는 “가거라. 아들아. 가서 네 뜻대로 해보아라. 실수하고 배우고 아파하고 성장해가며 네가 꿈꾸는 인물이 되어라. 염려할 것 없다. 너는 자유이다. 나는 늘 네 곁을 지키마”
아버지는 아들을 강압적으로 지배하기를 원치 않았고, 그 사랑의 표현으로 아들의 가출을 허용하신 것이다. 그렇다고 아들에 대한 사랑이 끊어진 것이 아니라, 아들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 상황까지 감수하신 것이다. 아버지는 아들이 아버지의 참 사랑을 제대로 깨닫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예수님의 이야기 속의 젊은이는 집을 뛰쳐나왔고 결국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렸다. 하지만, 아직 남아 있는 것이 하나있었다. 렘브란트의 그의 그림에서 오른편에 달린 ‘단검’을 통해 그것을 표현해 주고 있다. 그는 아버지의 아들이며 한 집안에 소속된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탕자는 말할 수 없는 어리석은 짓을 했으며 결국 밑바닥 신세가 됐다는 것을 누구보다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눅 15:13-16)
『[13]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14]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15]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6]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
탕자는 왜 하필 쥐엄열매를 먹었을까? (쥐엄열매사진)
모든 재산을 날린 아들은 입에 풀칠하려고 유대인들이 가장 혐오하는 돼지 치는 일까지 해야 했다.
그가 떠난 먼 나라는 분명 유대인 마을이 아니다. 유대인 지역에서는 돼지를 칠수가 없다.당시의 유대 북쪽으로는 데가볼리 지역으로 이방인들이 사는 지역이 있다. 둘째 아들이 멀리 떠난 나라는 데가볼리에 속한 10개의 이방도시 중 하나였을 것이다.
그 곳에서는 돼지의 사료로 가장 값싸고 영양소가 풍부한 쥐엄열매를 썼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 땅에 흉년이 들어 먹을 것이 떨어졌다. 상상해 보라 둘째 아들은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를 놓고 돼지와 쟁탈전을 벌여야 했다. 그것도 유대인들이 가장 경멸하는 동물인 돼지와 쥐엄열매를 놓고 경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보다 더 비참할 수는 없는 것이다.
콩과에 속하는 쥐엄 열매는 이스라엘에서 가난한 사람이 정말 먹을 것이 없을 때 마지막 먹는 식량이다. 끊는 물에 쥐엄 열매를 넣어 죽을 만들어 먹을 수 있었다고 한다.
우리식으로 표현하자면
“춘궁기 보릿고개 때 남들이 캐 먹는 풀뿌리도 먹지 못하고 배를 곯았다.”
그런데 그나마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하되 주는 자가 없다.’ 그 쥐엄 열매라도 먹을 수 있었을 때는 괜찮았는지 모르지만, 그것도 주는 자가 없는 데 까지 떨어진 것이다.
탕자는 그 때서야 돌이킨다.
[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그림에서)
그의 머리는 흐트러져 있다. 그의 개성을 보여주는 상징들 가운데 하나를 도적맞았다.
그의 의복은 그의 야윈 몸을 겨우 감쌀 수 있는 얇은 속옷 차림이다.
그의 발에 신겨진 구두창은 기나긴 굴욕의 여행담을 이야기해주고 있다.
유일하게 남은 위엄의 상징은 그의 엉덩이에 덜렁거리며 걸려있는 단검뿐이다.
그 검은 자신이 귀족 신분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이다. 그의 품위가 하락하는 와중에서도 그는 자신이 아버지의 아들이었다는 사실을 의지하고 있었다. 그것마저 없었다면 그는 아들을 입증하고 있는 상징인 귀중한 검을 팔아버렸을 것이다.
작은 아들은 사람들 중에 아무도 자기에게 최소한의 관심을 보이지 않자 자신이야말로 버림받은 자라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주변 사람들은 그가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는데 유용하다고 여겨질 경우에 한해서 그에게 관심을 가진다. 그러나 그에게서 돈이 떨어지고 받을 선물들이 다 없어지자 그는 더 이상 주변인들에게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완전한 이방인, 아무도 아는 체 해주지 않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는가? 무언가 공통점이 있다는 것 그것을 완전히 상실했을 때 진짜 고독이 찾아온다. 아무도 그에게 돼지의 음식조차 주려고 하지 않았을 때, 그 작은 아들은 자신이 최소한의 공통점, 즉 인간취급도 못받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버지, 나는 더 이상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으니.......” 한편으로 그 작은아들은 자신이 아들의 자격을 상실했음을 인식하고 있다. 동시에 자신이 잃어버릴 자격이라도 가지고 있었던 아들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비록 그를 존재의 밑바닥으로 끌고 간 것은 모든 것의 상실이었다.
자신을 돼지 만큼이라도 취급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자신에게 있음을 알고 나서 그는 돼지가 아니라 인간, 그것도 아버지의 아들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일단 자신이 아들이라고 하는 사실을 다시금 인식하게 되자 자신을 사랑하는 자라고 부르는 음성을 희미하나마 들을 수 있었다.
베드로와 유다에서도 똑같은 연결과 단절이 나타난다. 둘 다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받았고, 그러한 정체성을 가졌다. 하지만, 두 제제 모두 예수님을 떠났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했고, 베드로는 그 분을 부인했다. 이 둘 모두 잃어버린 자녀들이었다. 그러자, 자신이 더 이상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주장할 수 없었던 유다는 스스로 목을 메어 자살했다. 그는 자신이 아들이라는 신분을 상징하는 검을 팔아치운 것과 같다.
한편 베드로는 절망의 와중에서도 자녀임을 주장했고, 많은 눈물을 흘리며 되돌아왔다. 그는 닭우는 소리를 들으며 대성통곡했다.
유다는 죽음을 택했지만, 베드로는 생명을 택했다. 우리는 모두 주님을 떠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상처의 한 복판에서 나는 결코 사랑받지 못할 존재라고 스스로 자신을 포기할 것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것인가의 선택은 자신에게 달려있다.
내 인생은 살아가 가치가 도무지 없어, 나는 짐 같은 존재일 뿐이야 나는 문제아이고 분쟁의 씨앗이고 다른 사람들을 피곤케 하는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들과 상황들이 우리에게 수없이 일어난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 대한 이와 같은 어둡고 은밀한 의식을 가지고 살아간다. 탕자와 대조적으로 아버지에 대한 모든 믿음을 포기해 버리는 사람들이다.
멀고 먼 고향 가는길
자신이 아직 아들이지만 “아들”이라 불릴 자격을 이미 상실했다는 것을 말하면서 “고용된 일꾼”의 위치를 받아들일 준비를 스스로 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도 적어도 밥을 먹고 살고 있을 테니까 말이다.
여기서 하나님은 호된 심판의 하나님으로 비추어진다. 하나님은 나에게 아들의 신분을 완전히 회복시켜 주시려고 하는데, 나는 고용된 일꾼으로 남게 해 달라고 계속해서 고집하는 것과 같다.
“나는 하나님께 가서 최소한의 벌을 받으리라는 희망과 함께 힘든 노동을 조건으로 해서라도 살아남을 수 있게 해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용서를 구해야지”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고용된 일꾼으로서의 나는 여전히 거리감을 유지할 수 밖에 없고, 여전히 반항과 거부와 도망 혹은 봉급에 대한 불만의 가능성을 안고 있다. 반면에, 사랑 받는 아들로서의 나는 완전한 신분을 주장하며 내 스스로 그 아버지의 위치를 계승하기 위한 준비를 시작해야 한다.
진짜 탕자는 누구인가?
그 분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다.(요1:29) 죄를 알지도 못하신 분인데 우리를 대신하여 죄인 되신 분이다.(고후5:21)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사람과 같이 되신 분 (빌2:6-7)이다. 그분은 “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27:46) 고 부르짖었던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 분은 친히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우리가운데 오셨다. 그 분은 탕자인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친히 탕자가 되신 분이셨다.
잔치에 초대하는 아버지
최고를 주어라
그 아버지는 단 한마디의 질문도 없이 그저 용서하시며, 잃어버렸던 자기 아들이 집으로 돌아온 것을 환영하실 뿐 아니라 그에게 새로운 생활, 풍요한 생활을 주기 위해 단 일초도 기다리시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돌아온 아들에게 생명을 주고 싶은 열망이 얼마나 강하신지 거의 참을성이 없으신 분처럼 보일정도다. 그 어떤 것도 충분치 않다. 최고의 것을 그에게 주어야만 했다.
그 아들이 고용된 하인의 한 사람으로 취급당할 준비를 한 데 반해, 아버지는 특별한 손님을 위해 예비된 고급옷을 가져오라고 시켰고, 한사코 그 아들은 아들이라 불릴 자격이 더 이상 없다고 느껴지는데도 불구하고, 그 아버지는 그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고, 그의 발에 새 구두를 신겨 줌으로써 그를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로 인정하고 자신의 상속자의 신분을 회복시켜주고 있다.
새 신발의 상징이 뭘까? 맨발은 가난을 상징하며 때로는 노예임을 암시하기도 한다. 신발은 부와 힘을 상징하며, 뱀으로부터 보호해 주기도 한다.
그 아버지는 종들에게 옷과 반지와 신발을 가져다 자기 아들에게 입히라고 명하면서 ‘어서’라는 말을 하고 있는데, 이것은 성급한 마음이상이 것을 담고 있다. 이것은 태초부터 준비되어 있던 새로운 하나님 나라를 시작하고 싶은 하나님의 열망을 보여준다.
(사 43:1, 4-5)
[1]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4]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네 대신 사람들을 내어 주며 백성들이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 [5] 두려워하지 말라 ....
기쁨으로 초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주된 묘사는 잔치에 있다. 왕이 자기아들을 위해 베푸는 결혼잔치(마8) 어린양의 혼인잔치(계19) 잃어버린 양을 찾은 목자와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은 여인의 잔치(마8)
이 모든 소리들은 하나님의 목소리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기쁨을 혼자만 즐기고 싶어하지 아니하신다. 모든 사람이 동참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기뻐하신다. 세상의 문제가 해결되고 인간의 고통이 막바지에 이르고 수천명이 회개하고 그 분을 찬양하기 때문이 아니다. 바로 잃어버리 자녀 중 한 사람을 찾았기 때문이다. 통계적으로 따지면 그것은 관심의 대상조차 되지 않는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숫자를 문제로 보지 않으신다. 전 인류가 희망을 잃어버렸을 때 끝까지 기도하는 한 사람, 예루살렘성이 멸망되어 갈 때 의인 한 사람을 찾으시는 것이다. 이들 때문에 이 세상이 파멸에서 건짐을 받게 될 지 누가 알겠는가?
탕자의 비유는 자녀들과 교제하기 위해 끈질기게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놀랍도록 정확하게 포착한 비유이다. 자식이 집을 나간다 할찌라도 사랑의 주님은 돌아오길 기다리신다.
우리는 어쩌면 매일, 매시간 떠나고 돌아오길 반복한다. 떠나고 돌아오는 건 삶의 단막극이 아니라 계속 이어지는 연속극이다. 주님은 이렇게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 9:13)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너를 너무 사랑해서 세상을 살아가며 선택할 자유를 주었다. 그러나 기억해라. 내가 가진 건 모두 네 것이다. 너는 늘 나와 함께 있을 것이다. 어리석은 선택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너를 향한 내 사랑은 늘 진실하고 변함이 없단다. 그러므로 어서 돌이키고 나를 닮은 모습으로 살아가라”
이제, 아이는 아이의 상태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아이는 어른이 된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된다. 탕자는 돌아올 때, 아이로 남아있기 위해 돌아온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아들 신분을 주장하고 나아가 자기자신도 아버지가 되기 위해서 돌아온 것이다.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롬8:16-17)
아버지에게로의 귀향은 궁극적으로 아버지가 되겠다는 도전인 것이다. 우리에게 ‘하나님아버지의 온전하심처럼 너희도 온전한 자라 되라!’는 말씀을 기억하며, 주님으로부터 용서받은 우리가 용서하고, 사랑받은 우리가 사랑하는 주님의 마음을 본받는 자 되기를 기도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