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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38 편 주 나의 구원이시여

영혼의 양식

by 로드비취 2020. 10. 25.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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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기도

 

[1] 여호와여 주의 노하심으로 나를 책망하지 마시고 주의 분노하심으로 나를 징계하지 마소서

시작기도는 시 6:2과 거의 동일하다.

(6:2) 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

시인을 자신의 질병을 하나님의 징계와 책망에 속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자신의 상황 인식이 정확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상기해야 한다. 육체적 정신적 절망가운데서 신학적 시각이 왜곡되기 쉽다.

(1) 그는 심하게 아팠다.

(2)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으로서 최소한 그의 질병을 허락하셨다.

(3) 시편 기자는 그가 솔직히 고백하는 바와 같이(18) 죄를 범했다.

[18] 내 죄악을 아뢰고 내 죄를 슬퍼함이니이다

하지만, 6편에서도 사정이 그렇지 않았고, 욥기에서도 그렇지 않았다. 그러나 시인의 자기 인식이 정확한 것이었든지 아니었든지 1절은 적절한 도입부분이다. 그가 느낀 것이고, 하나님에게 정직하게 말해야만 했다.

 

질병에 대한 묘사

 

[2] 주의 화살이 나를 찌르고 주의 손이 나를 심히 누르시나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화살과 그의 손이 가져다 준 것이었다.

이것을 마음에 새기면 하나님은 우리의 죄 대문에 우리를 징계하신다. 화살들처럼 하나님의 벌은 영혼을 고나통하기 위해 조용하고 빠르게 날아와 박힌다. 하나님이 그 자신의 백성에게 화살들을 소신다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 이상하게 보일 수 있다. 이것은 우리의 죄가 실제로 얼마나 끔찍하고 위험한지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우리는 대로 질병, 고통이 하나님의 징계이긴 하지만, 주로 그렇지 않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는 기회가 된다. 때로 욥처럼 우리는 정확히 순종하기에 고통받는다. 욥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1:1)였다.

요한복음에서 보지 못한 채 태어난 한 남자에 대해 제자들이 누구의 죄인지, 그 사람의 죄인지 그의 부모의 죄인지 논쟁한다. 주님은 말씀하신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9:3)

우리의 병이나 고통이 죄와 관련 없을 수 있음을 기억하라. 하나님이 우리 삶에서 엮으시는 어두운 실땀들을 통해 하나님이 역사하실 수 있는 많은 선한 계획들이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하나님 자신이 하고 계시는 일을 아신다는 것을 신뢰할 필요가 있다.

 

[3] 주의 진노로 말미암아 내 살에 성한 곳이 없사오며 나의 죄로 말미암아 내 뼈에 평안함이 없나이다

은 피부상의 질병 또는 표면적인 질병을 의미하는 표현이고, ‘는 모든 내부적 질병을 의미하는 표현이다. 겉으로 드러난 상처, 쑤시는 허리, 마비, 충혈, 불안한 가슴, 두근거림, 눈의 이상 등이다.

 

[4] 내 죄악이 내 머리에 넘쳐서 무거운 짐 같으니 내가 감당할 수 없나이다

[5] 내 상처가 썩어 악취가 나오니 내가 우매한 까닭이로소이다

[6] 내가 아프고 심히 구부러졌으며 종일토록 슬픔 중에 다니나이다

[7] 내 허리에 열기가 가득하고 내 살에 성한 곳이 없나이다

[8] 내가 피곤하고 심히 상하였으매 마음이 불안하여 신음하나이다

[9] 주여 나의 모든 소원이 주 앞에 있사오며 나의 탄식이 주 앞에 감추이지 아니하나이다 [10] 내 심장이 뛰고 내 기력이 쇠하여 내 눈의 빛도 나를 떠났나이다

 

질병에 대한 친구들과 친지들의 반응

 

[11] 내가 사랑하는 자와 내 친구들이 내 상처를 멀리하고 내 친척들도 멀리 섰나이다

[12] 내 생명을 찾는 자가 올무를 놓고 나를 해하려는 자가 괴악한 일을 말하여 종일토록 음모를 꾸미오나

[13] 나는 못 듣는 자 같이 듣지 아니하고 말 못하는 자 같이 입을 열지 아니하오니

[14] 나는 듣지 못하는 자 같아서 내 입에는 반박할 말이 없나이다

[15] 여호와여 내가 주를 바랐사오니 내 주 하나님이 내게 응답하시리이다

[16] 내가 말하기를 두렵건대 그들이 나 때문에 기뻐하며 내가 실족할 때에 나를 향하여 스스로 교만할까 하였나이다

[17] 내가 넘어지게 되었고 나의 근심이 항상 내 앞에 있사오니

[18] 내 죄악을 아뢰고 내 죄를 슬퍼함이니이다

[19] 내 원수가 활발하며 강하고 부당하게 나를 미워하는 자가 많으며

[20] 또 악으로 선을 대신하는 자들이 내가 선을 따른다는 것 때문에 나를 대적하나이다

 

2-10절이 질병의 첫 결과가 죄의식과 하나님으로부터의 격리감이었다면, 두 번째 결과는 동료들로부터 소외당했다는 느낌이다. 그런 느낌은 편집증에 의한 것이다. 또 악인들은 시편 기자의 약해진 상태를 이용하려 했을 것이기에 부분적으로 실제적이다.

11절은 편집증에 가까운 면을 보여준다. 그는 친구들과 사랑하는 사람들까지도 등을 돌리고 있다고 말한다. 비록 그들이 겉으로 드러난 상처의 악취 때문이거나 전염을 피하고자 등을 돌렸어도(5) 그들의 행위는 환자에게 보다 깊은 불안을 가져다주었다.

13-15절은 12절의 마지막 행을 발전시킨 것으로 고찰된다.

시인은 적들의 거짓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기보다 차라리 귀머거리와 벙어리처럼 행동하면서 그들과 더불어 따지기를 거부한다. 그는 욥처럼 자신의 생각을 솔직히 표혔고, 이제 그는 하나님께 달려있으므로 그분으로부터 응답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이것은 거절과 고립의 그림이다. 예수님이 십자가로 가셨을 때 예수님 삶에서 완성되었다. 제자들 모두 도망했고, 심지어 예수님곁에 끝까지 남겠다 맹세한 베드로조차 도망했다. 누가는 예수님이 죽으셨을 때 모든 그의 친구와 따르는 자가 예수님께 일어난 일을 멀리 서서 지켜보고 있었다(23:49)고 전한다.

(23:49) 예수를 아는 자들과 갈릴리로부터 따라온 여자들도 다 멀리 서서 이 일을 보니라

 

우리는 때로 친구들이 가장 필요할 바로 그때 우리 역시 버림받았다고 느낀다. 이것은 상처가 된다. 예수님 역시 그것을 체휼하셨다. 그분은 혼자셨지만, 그는 결코 우리를 홀로 둣히지 않는다. ‘그가 친히 고난을 당하셨은즉, 고난당하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

우리는 욥의 친구들처럼 그런일이 왜 일어났는지 설명할 필요가 없다. 그저 거기에 있어주기만 해도 된다. 우리 형제 자매가 고통받을 때, 그저 함께 있어주는 일,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마지막호소

 

[21] 여호와여 나를 버리지 마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멀리하지 마소서

[22] 속히 나를 도우소서 주 나의 구원이시여

하나님께 버림받았다는 느낌은 수많은 적들이 근접해 있다는 느낌으로 인해 더욱 가중되고 있다.

21: 나를 버리지 마소서 시 22:1

21: 나를 멀리하지 마소서 시22:12

22: 속히 나를 도우소서 시22:20

시인은 시 22편과 같은 어조로 하나님께 호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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