써도 써도 고갈되지 않고 넘쳐 흐르는 이 가능성이 바로 '어린이'라는 실재이다. 아이들은 누구나 무엇을 만들려 한다. 단순한 호기심때문만이 아니다. 어린이가 원하는 것은 이 물건이 생성되어 가는 과정에 직접 참여하는 것이다. 이 아이들을 교육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 포용교육
'자유'라는 유행에 입각한 현대 교육이론은 펌프로 퍼 올리듯 아이들의 가능성을 끌어 올리려 한다.
'권위'라는 전통에 의존한 교육이론은 깔대기로 정교하게 주입하는 주입식 교육의 한 극단에 서 있다.
전자는 에로스적인 교육이라 할 것이요, 후자는 권력의지적인 교육이라 할 수 있다. 에로스적이고 지배지향적인 인간의 확실성을 흔들어 놓는 그러면서도 흔들어 놓는 것 이상을 가능하게 하는 하나의 기초적 경험을 제시한다.
개별적 충동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방향 체계를 바꿔 놓는 '개별적 충동의 방향전환'이다. 여기에 포용하는 강력함이 '이끎'이다. 포용하는 에로스라야 사랑인 것이다.
깔대기식 권력의지 교육과 그 반대의 펌프식 에로스적 교육의 이 두가지 극단에 '포용교육'이라는 이론을 마르틴 부버는 제시한다.
포용의 요소는 3가지이다.
1. 어떤 종류의 관계인 두 사람이 서로에게 있다.
2. 이 둘에 의해 공동으로 경험된 과정에 어쨌거나 둘 중 하나사람은 행위에 참여하면서 참여되어 있어야 한다.
3. 바로 이 한 사람이 그 공동의 과정을 다른 한 사람으로부터 상대방의 입장에서 체험하는 것이다.
어린이는 반쯤 눈을 감고 누워서 엄마가 말 걸어 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신뢰, 세계를 향한 신뢰, 바로 그 사람, 즉 엄마가 있기 때문에 아이에게 교육은 이루어진다.
이것이 바로 포용교육이다. 신뢰에 바탕을 둔, 사람의 전인성에 바탕을 둔 교육이다.
* 성격교육
개성은 정신적 신체적 유일성의 개인과 그 속에 깃들어 있는 힘들을 의미하는 것이고, 성격은 개별자라는 존재 및 그의 행위와 태도의 결과 사이의 연관을 의미하는 것이다.
개성은 하나의 완성작이지만, 성격은 하나의 과제이다. 개성이 돌보고 촉진시켜 주어야 하는 어떤 것이라면, 성격은 교육될 수도 있고 교육되어야 하는 것이다.
학생이 교육자를 한 사람으로 받아 들일 때, 이 사람을 신뢰해도 된다고 느낄 때, 이 사람이 나에게 영향을 미치려고 하기보다는 나를 확인시켜 주려고 한다는 것을 느낄때 '성격교육'은 제대로 시작될 수 있다.
- 마르틴 부버의 글은 결코 쉽지는 않다. 하지만, 고전으로서 거대한 맥을 짚어 주고 있다. 교육에 대해서 한번쯤 생각한다면 질긴 갈비라도 한번 꼭꼭 씹어주길 바란다.